


[희년 이야기] 룻과 보아스의 기업 무르기(6)
룻 2:14-16, “14.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보아스가 룻에게, 그리고 룻을 통해 나오미에게 베푼 인애는, 룻에게 볶은 곡식을 룻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많이 주고, 또 룻이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허락할 뿐만 아니라, 룻을 위하여 일꾼들이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룻에게 줍게 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룻 2:17-20, “17.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하루에 주어서 턴 보리가 한 에바쯤이나 되었다. 에바는 부피 단위로서, 한 에바는 열 오멜이다(출 16:36). 그런데 만나 사건에서 만나 한 오멜은 한 사람의 하루치 분량이었다(출 16:16). 따라서 룻이 하루 동안 주워서 떤 보리 한 에바는 한 사람이 열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오미도 베들레헴 출신이기 때문에 보통 하루에 주울 수 있는 이삭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오미는 이렇게 많은 보리를 주울 수 있게 허락한 사람이 누구인지 룻에게 묻고, 그가 바로 보아스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렇게 말한다.
20절상,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여기에서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의 ‘그’는 누구인가? 바로 보아스이다. 그럼 그 다음에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에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그’는 누구인가? 여기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문법에서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는 일반적으로 그 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명사인데, 이 구절의 히브리어 문장에서 관계대명사에 가장 가까운 명사가 바로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맥으로 보면 보아스일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존재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문맥에서 보아스일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사실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 보아스를 통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뜻한다(Katherine Doob Sakenfeld, 룻기-목회자와 설교자를 위한 주석, 민경진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96-98).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여기서 ‘은혜’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로 헤세드 곧 ‘언약에 신실한 사랑’이다. 그리고 나오미의 이 고백에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빈손으로 절망어린 비탄에 빠진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한 나오미를 사랑하사 구원하기 시작하신다. 그녀의 원망을 감사로 바꾸시고, 절망의 비탄을 희망의 찬양으로 바꾸기 시작하신다.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의 이 고백을 하나님이 룻기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나오미와 같이 절망과 비탄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에게, 눈을 들어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절대 잃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