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통한 새 창조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의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 때 시리아-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귀신들린 딸을 고쳐 주심으로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확장성은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마태와 누가와 다르게 마가는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출발하여서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을 관통하여서 갈릴리 호수 해변가에 다시 도착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께서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역을 하셨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마태는 예수님께서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신 사건 이후에 갈릴리 호수가에 도착하여서 산에 올라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고(마 15:29-31), 누가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눅 9:10-17)을 행하신 후에 장로들의 전통과 관련된 내용과 이방인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복음 사역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북쪽으로 대략 35km 정도 떨어진 시돈을 거쳐 군대 귀신 들린 거라사 광인을 고쳐 주신(막 5:1-20) 데가볼리 지역의 중앙을 관통하여서 갈릴리 호수 해안가에 도착하는 여정을 기록하면서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의 확장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복음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마가는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남자를 고쳐 주시는 사건을 기록하여서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제자도와 이방인 전도 사역에 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막 7:31) 그리고 [그(예수)는] 다시 두로 지역에서 나와 시돈을 관통하여서 데가볼리 지역 중앙을 지나 갈릴리 바다로 가셨습니다. (32) 그리고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을] 그(예수)에게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기를 그(예수)에게 간청했습니다. (33) 그러자 그(예수)가 무리로부터 그를 따로 데리고 사적인 공간으로 가서 자신의 손가락들을 그의 [양쪽] 귀에 넣고 그리고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34)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시며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에파타” 이것은 ‘완전히 열려라’라는 의미입니다. (35) 그러자 즉시 그의 양쪽 귀가 열렸고, 그의 혀의 결박이 풀려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36) 그리고 그(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예수)가 그들에게 명령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널리 알렸습니다. (37) 그리고 그들은 지극히 크게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 듣지 못하는 자들이 듣게 하시고, 말을 못하는 자들이 말하게 하신다.” (Translated by YG Kim)
마가는 제자들의 두 번째 짧은 배 여행(막 6:45-8:10)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정결(tahor: clean)과 부정(tame: unclean)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통하여 이방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혈통과 장로들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을 때, 부정의 개념을 마음 속에서 나오는 12가지 악한 생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여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혈통과 장로들의 전통의 중요성을 파기하고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의 확장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가가 유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남자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사건은 이방인 사역에 관한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에서 육체적 질병을 뛰어 넘어서 영적으로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 결과 복음을 깨닫지 못하여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관한 상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 그 소식은 널리 펴져 두로와 시돈에까지 전파되었고, 그 결과 그 곳에서도 많은 무리들이 갈릴리에 몰려왔습니다(막 3:8). 또한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의 열 개 도시 중 하나인 거라사의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을 때 거라사의 광인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고침을 받은 자에게 그 곳에 남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라고 하셨기에(막 5:18-19) 이미 복음은 거라사도 포함되어 있는 데가볼리의 열개 도시에도 전파되었습니다.
따라서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을 관통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예수님을 통하여 기적을 경험하고 복음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해안가에 도착하셨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공동체 안에 있는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한 남자를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막 7:32). 마가복음 7장 32절의 말씀에서는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사용이 되는(hapax legomena) ‘모기라오스’(mogilalos)라는 형용사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말하기가 어려운’(speaking with difficulty)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온 이 남자는 단순히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상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듣지 못해서(kophos: to lack of hearing capability) 그 결과 언어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막 4:3, 9, 20, 23, 24; 6:11; 7:14; 7:32).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해서 깨닫지 못하는 자들과(막 2:6-7; 3:1-6; 4:10-12; 7:1-13),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함을 받는 자들을 동일하게 기록하여서(막 3:8-12; 5:27-34; 7:24-30)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듣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남자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의 확장성의 한계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 넘어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 남자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서 사적인(in private) 공간으로 데리고 가셔서 고쳐 주십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에서 사적인 공간은 가르침의 장소이고(막 4:34; 9:28; 13:3), 쉼의 장소이며(막 6:31-32), 치유의 장소이고(막 7:33),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소입니다(막 9:2).
우리는 복음의 확장성 측면에서 왜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 남자를 공개적으로 고쳐 주지 않으셨는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 모티브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이 마귀들과(막1:25, 34; 3:12), 제자들과(막 8:30; 9:9), 기적을 경험한 증인들과(1:43-45; 5:43; 7:36; 8:26), 그리고 군중들(막 7:24; 9:30)에 의해서 전파되는 것을 막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성취되었는지를 독자들에게 보다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남자를 고쳐 주시는 과정은 네 단계로 진행이 됩니다. (1)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손가락을 이 남자의 양쪽 귀에 넣은 후, (2)침을 아마도 예수님 자신의 손에 뱉어 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3) 이러한 행동을 하신 후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고, (4) 마지막으로 “에파타”(Ephphatha)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남자의 귀에 손가락을 넣은 행동은 출애굽의 과정에서 세 번째 재앙인 티끌이 이가 되었을 때 마술사들이 바로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This is the finger of God)(출 8:19; LXX 출 8:15)라고 말하는 표현을 상기시킵니다. 마술사들은 아론이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땅의 먼지를 쳤을 때, 사람과 짐승에게 이가 생기고, 애굽 땅의 모든 먼지가 이가 되었을 때(출 8:17) 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 남자의 귀에 손가락을 넣는 행동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는 시작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5:8절에서 부정의 의미에서 사용이 되는 침을 자신의 손에 뱉어서 이 남자의 혀를 만졌습니다. 레위기 15장 8절에서는 유출병이 있는 부정한 자가 침을 뱉어 정결한 자의 옷에 묻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 – 로마의 침 치료 관습을 사용해서 이 남자의 혀를 만지셨습니다(A. B. Collins, Mark: a commenta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370-371). 이러한 행동은 사람의 부정이 외부적인 요소에서 이루어진다는 장로들의 전통에 반대하여서 유대인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침을 치료의 도구로 사용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 남자의 귀와 혀를 만지시고 난 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는 행동은 기도와 연결되어져 있는데(막6:41),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표현은 이 남자의 뜻하지 않은 불행한 상황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 남자에게 “에파타”라고 외치셨을 때 이 남자의 양쪽 귀는 열렸고, 그의 혀도 결박이 풀려서 분명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막 7:35).
메시아의 비밀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 남자를 데리고 온 무리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이 소식은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마가는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 남자를 고쳐 주신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통한 새 창조(new creation)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표현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31)입니다. “좋았더라”라는 히브리어 동사 ‘토브’(tob: to be good)를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LXX)에서는 ‘칼로스’(kalos)라는 헬라어 형용사로 번역을 하였는데, 이 형용사가 동일하게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는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막 7:37)라는 표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35:5-6절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의 사역이 예수님의 기적을 통하여 실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사 35:5-6) 그때에…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귀가 열릴 것이며, …말 못하는 사람의 혀가 기뻐 노래할 것이니…(바른 성경)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어질 때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영적으로도 듣지 못하고, 복음을 바르게 전하지 못하는 자들이 깨달아 복음을 직접 듣고 바르게 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기>
- 공관복음서에서 왜 마가는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남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유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 제자들의 두 번째 짧은 배 여행(막 6:45-8:10)에서 정결과 부정이 중요한 주제가 되어집니다. 이러한 정결과 부정의 개념이 예수님의 이방인 사역과 연결되어져 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입니까?
- 마가복음에서 사적인 공간은 어떠한 장소입니까?
- 왜 예수님께서는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남자를 공개적으로 고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를 메시아의 비밀의 모티브로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남자를 고쳐 주시는 단계는 네 단계입니다. 각 단계별로 특징을 설명해 보십시오.
-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남자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을 때 사람들은 “그는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이 새 창조와 연결되어져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이사야서 35:5-6절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남자를 고쳐 주시는 사건은 어떠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