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예수님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님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막 4:3-9) 그 의미를 제자들과 예수님의 주변에 있었던 자들에게 해석해 주시고(막 4:14-20) 난 후에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등불과 측량의 비유(막 4:21-25)이고, 나머지 두 개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막 4:26-29)와 겨자씨 비유(막 4:30-32)입니다.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 비유가 ‘씨’(sporos: seed)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면, 등불과 측량의 비유는 씨앗의 비유들과 어떠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까?

등불과 씨앗의 공통점은 감추어져 있었던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계신데, 그 의미를 듣고 올바르게 측량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측량을 받게 될 것입니다(막 4:24-25).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등불과 측량의 비유는 ‘A-B-B´-A´’ 형식의 대칭형 구조(chiasmus)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A: 막 4:21-22)과 끝(A´: 막 4:24c-25)에서 등불과 측량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중앙에 듣는 것(B: 막 4:23)과 듣는 것에 관한 또 다른 권면(B´: 막 4:24a-b)을 말씀하십니다.

(막 4:21) 그(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등불이 들어오면 바구니 아래나, 침상 아래에 놓기 위해서 들어오겠느냐? 등잔대 위에 놓기 위에서 [들어오지] 않겠느냐? (22) 숨겨진 것은 예외 없이 드러나게 되어 있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24) (a)그(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b)“너희는 듣는 것을 주의하라. (c)너희가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고, 그리고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25) 가진 자는 더 받게 될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4장 21절에서 등불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등불이 방 안에 들어오면, 곡식을 담는 바구니를 비스듬히 세워서 그 아래에 두거나, 침상 아래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올려 놓는데 그 이유는 방 안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마 5:15)과 누가복음(눅 8:16)과 달리,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등불’(lychnos: lamp)이라는 단어 앞에 헬라어 정관사 ‘호’(ho)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은 일반적인 등불이 아니라 ‘그 등불’(the lamp)로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신학자들은 ‘그 등불’의 의미를 크게 네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등불은 예수님의 비유를 깨달은 예수님 주변에 있는 자들입니다(French, The Gospel of Mark, 2002, 208). 둘째,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Marcus, Mark 1-8, 2000, 318). 셋째, 등불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Guelich, Mark 1-8:26, 1989, 231). 넷째, 등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Witherington, The Gospel of Mark, 2001, 169-170).

이러한 해석 가운데에서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등불이 [방 안에] 들어온다는 헬라어 동사 ‘에르코마이’(erchomai: to come)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사람이 등불을 가져온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가져오다’(phro: to bring with)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그 주체가 사람임을 명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가져오는 주체로서 사람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그 등불이 주체가 되어서 [방 안에] 들어오는 모습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등불이 방안에 스스로 들어오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막 1:15).

메시아의 비밀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감추어져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막 4:22).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듣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막 4:23). “누구든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자”가 듣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1차적인 목적으로 끝이 나지 않고,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주의하라’(막 4:24b)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의하다’(blepo)라는 헬라어 동사의 의미는 1차적으로 ‘보다’(to se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다’(to pay especially close attention to)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의 비유를 가까이에서 듣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께 측량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등불의 비유 가운데에서 들음을 강조하시고 갑자기 측량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사람이 저울질을 하는 행동은 들음과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막 4:24c-25).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울질하다’(metreo: to measure)라는 의미는 단순히 양적 크기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를 올바르게 측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 또한 측량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사람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인데, 하나님께서 행동의 주체가 되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은 자들을 측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측량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과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의 이미지를 통하여 내부자(inside)와 외부자(outside)의 차이점을 말씀하십니다(막 4:25). 마가복음 4장 10-34절의 말씀 가운데에서 내부자(막 4:10-11a; 20; 24-25a; 34b)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을 의미하고, 외부자(막 4:11b-12; 25b; 33-34a)들은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해석을 듣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구분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깨달은 자들은 더 많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의 비유를 깨닫지 못한 자들은 마치 씨 뿌리는 자들의 비유에서 처음 세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 가진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과 측량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두가지 씨앗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에서 농부의 역할보다 땅의 역할을 강조하신 것처럼,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에서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특별히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는 공관복음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 4:26) 그(예수)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27) 그가 밤과 낮으로 자고 일어나는 동안 씨는 싹이 트고 자라지만, 그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맺힌다). (29) 곡식의 (상태가) 허락하면 즉시 낫을 대는데, 이것은 추수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씨앗은 스스로 싹을 틔우고, 이삭을 맺고, 충실한 곡식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최적화 되어진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씨앗의 비유에서 길가나, 흙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돌밭이나,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환경적인 요인을 언급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고 수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성장하였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씨앗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하고 계신 내용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은밀하게 자라나지만,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데,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수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막 4:30) 그(예수)가 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유할까? 또는 어떤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그것은 겨자씨 같으니, 땅에 뿌려졌을 때에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씨앗들보다 작으나, (32) 뿌려지면 자라서 모든 풀 가운데에서 가장 커지고, 큰 가지를 만들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둥지를 틀 수 있게 된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 당시에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으로 청중들에게 인지 되었습니다. 1세기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식용 작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마태(마 13:32)와 누가(눅 13:19)는 겨자를 나무(dendron: tree)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작은 씨앗으로 인식된 겨자씨는 모든 풀보다 커지면서 그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겨자씨가 가지고 있는 생산력과 확장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그 시작은 매우 작으나, 열매를 맺고 확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작은 겨자씨에 새 들이 둥지를 틀 수 있다는 의미는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열방이 강한 나라 아래에 들어오는 것을 상징합니다(겔 17:23; 단 4:12)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막 4:33) 그(예수)는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만큼 많은 이러한 비유들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34) 그러나 비유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시 않으시고,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사적으로 모든 것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함께 나누기>

  1. 마가복음에서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이 상징하는 네 가지 가능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해석을 선호하십니까?
  1. 만일 우리가 등불과 관련된 네 가지 해석 가운데에서 네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등불은 스스로 들어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가져오는 것입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들음과 측량의 비유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측량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마가복음 4장 10-34절의 말씀 가운데에서 내부자와 외부자를 나누어 보십시오.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과 겨자씨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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