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의해 파송된 군대에 의해서 사로잡히시고(마 26:47-56), 공회에 끌려 가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에 의해 심문을 당하셨습니다(마 26:57-68). 그러나 대제사장 가야바는 사형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제국의 유다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마 27:1).

사복음서 가운데에서 누가와 요한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하고 있습니다(눅 23:14b; 요 18:38b). 빌라도는 예수님이 죽을 죄를 지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채찍질을 행하였습니다(눅 23:16, 22).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키는 것을 걱정해서 유대인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마 27:24a; 눅 23:25). 결국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맞으신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정에서 죄수에게 채찍의 벌을 내릴 때에는 세 가지 형태의 채찍형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채찍형은 ‘푸스티가티오’(fustigatio)라고 불리는 형벌인데, 가장 약한 형태의 태형(beating)으로 가벼운 범죄에 부과되는 형벌입니다. 이 형벌의 목적은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훈계나 경고를 목적으로 하는 형벌로 주로 공동체에서 폭력 행위에 관한 처벌입니다. 두 번째 채찍형은 ‘플라겔라티오’(flagellatio)라는 형벌로 보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게 내려지는 강한 태형(flogging)으로 사형을 전제로 행하는 처벌은 아니지만, ‘푸스티가티오’보다 훨씬 더 강한 처벌입니다. 세 번째 채찍형은 ‘베르베라티오’(verberatio)라는 형벌인데, 가장 심각한 형태의 태형(flogging)으로 항상 다른 형벌과 함께 부과되었으며, 보통 십자가형을 포함한 사형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David A. Croteau, “Is the two-floggings hypothesis a viable option? A reconstruction of the order of the floggings of Jesus,” JETS 63.4 (2020): 666).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1세기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사람들이 채찍형을 당하였을 때 너무 심하게 채찍질을 당해, 일부의 죄수들은 형벌장에서 끌려 나가 바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심한 병을 얻어서 오랫동안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The victims] were scourged with such severity that some of them died immediately upon being taken away, while others were so grievously injured that their recovery was despaired of.” (Philo of Alexandria, Against Flaccus. 10.75).

예수님께서는 채찍형 가운데에서 가장 중대 범죄자를 다루는 ‘베르베라티오’라는 형벌을 당하셨고 십자가 형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형벌에서 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이유는 극심한 고통을 주기 위한 형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을 때 예수님께서 스스로 숨을 쉬시기 위해서는 못이 박힌 다리로 몸을 밀어 올려야 하셨는데, 이 때 엄청난 고통이 온 몸에 전달이 되어지고 스스로 몸을 밀어 올리지 못하셨을 때 서서히 피를 흘리시면서 고통이 극대화 되어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 형벌을 요구한 이유는 신명기 21:23절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유대인들은 정결법에 의해서 죄인이 죽음으로 땅을 더럽히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십자가 형은 발이 땅에 닿지 않으므로 땅을 더럽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종으로 자신을 속건 제물(guilt offering)로 드리신 이유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사 53:11-12). 따라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는 장면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사야서 53:5절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 메시아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고난 받는 종의 찔림(halal: pierced)과 상함(daka: crushed)과 징계(musar: chastisement)와 채찍(habbura: wound)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들의 허물(pesa: transgression)과 죄악(awon: iniquity)은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는 모습 가운데에서 찔림과 상함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징계와 채찍에 맞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평화(salom: peace)를 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종으로 자신을 속건 제물로 드리셨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통하여 죄로 인하여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샬롬’의 복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창 15:6; 사 53:11; 갈 3:24). 또한 이러한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깨어진 언약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징계를 받으신 모습은 언약의 중보자께서 우리를 위해서 언약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들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사야서 5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음을 얻다’(rapa: to heal)는 히브리어 동사의 일차적인 의미는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나음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50:2; 대하 16:12). 그러나 이 동사가 은유적으로 사용이 될 때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출 15:26; 호 6:1). 고난 받는 종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채찍에 맞으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내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렇게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으로 우리들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죄와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10절에서 시편 14:1절을 간접적으로 인용해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언급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가상 칠언(The Seven Last Sayings of Jesus on the Cross) 가운데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 19:30)입니다. 요한복음 19: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모든 일”(panta: all)이란 하나님의 구원 계획(God’s salvation plan)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청년들의 요청으로 빌립이 안드레에게 이야기 하였을 때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b-24)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7절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1:7)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는 그[그리스도] 안에서 그[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속량 곧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성경에서 사용이 되어지는 ‘속량’(apolytrosis: redemption)의 용례는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을 찾아본다고 하면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의 친척들이 노예로 팔려간 가족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값을 대신 지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레 25:48-49). 이러한 원칙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재산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어집니다.

속량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사용이 되어질 때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대속물’(lytron: ransom)로 내어 주심을 의미합니다(막 10:45).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나누기>

  1.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법정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세 가지 채찍형은 무엇입니까?
  1.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명기 21:23절의 말씀에 근거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1. 이사야서 53:5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1.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종으로 자신을 속건 제물로 드리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속량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사용이 될 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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