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 속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예수님
마가복음 4:35-8:26절에 기록되어 있는 배를 타고 움직이는 세 번의 짧은 여행에서 6장 45절은 두 번째 여행의 시작점입니다. 첫 번째 여행(막 4:35-6:44)과 두 번째 여행(막 6:45-8:10)의 시작점과 끝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주권(Lordship)으로 시작되어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사건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여행의 시작점(막 8:14-21)에서 오병이어의 사건과 칠병이어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막 8:14-20).
제자들의 두 번째 여행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으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서 배를 태워 갈릴리 호수 벳새다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동시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많은 무리들을 흩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기도하러 가신 후에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나타나신 사건은 참된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막 6:45) 그리고 즉시 그(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벳새다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셨습니다. 그 동안 그(예수)는 무리를 흩으셨습니다. (46) 그리고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에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가셨습니다. (47)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그 배는 바다 한 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홀로 육지에 계셨습니다. (48) 그리고 그들이 노를 젓는 일로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 그 이유는 바람이 그들에게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 대략 밤 사경에 그들에게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그리고 그들을 지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49) 그러나 그들이 그(예수)가 바다 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50) 왜냐하면 그들 모두 그(예수)를 보고 공포에 질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예수)는 즉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가져라, 나는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51) 그리고 그(예수)가 그들이 [있는]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러자 그들 스스로 매우 많이 놀랐습니다. (52) 왜냐하면 그들이 빵에 관하여 깨닫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입니다. (Translated by YG Kim)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르고 있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놀라움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즉시(immediately)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벳세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벳세다 지역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입니다(요 1:44).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두 번째 배의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부인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자신들의 고향인 벳세다 지역의 밤 바다를 잘 알고 있었고, 벳세다 지역이 고향인 빌립도 어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해도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제자들과 무리들을 직접 분리시키셨고, 예수님 자신도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막 6:46). 마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위에서 거스르는 바람 속에서 노를 젓느라고 고생하는 역경(plight)의 모습을 대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인 벳세다 지역에 보내신 시간이 저녁이라면 제자들은 대략 밤 사경(새벽 3-6시경)에 이르기까지 갈릴리 호수를 건너 벳세다 지역에 도착하지 못하고 풍량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에도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난 후에 즉시 제자들을 벳세다 지역으로 보내신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의 소리만을 듣고 스스로 자만하고 거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흩으시고 산으로 가셔서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과 분리되었을 때 비록 그들 가운데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어부였고, 빌립과 도마도 어부로 추정되지만 갈릴리 호수의 현실적인 풍랑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기도 가운데에서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노를 젓는 일로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셨다고 기록합니다(막 6:48a).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풍랑 가운데에서 바로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그들을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막 6:48c).
먼저 우리는 자연을 향한 예수님의 주권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 번째 여행의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의 첫 번째 배 여행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의 큰 바람과 더불어 폭풍으로 어려워 하고 있었던 제자들과 달리 배의 뒤쪽에서 베개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간곡히 부탁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간곡한 요청에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습니다(막 4:39). 이러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유령(phantasma: ghost)이었습니다(막 6:49).
예수님께서 중력(gravity)의 법칙을 뛰어 넘어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시는 모습은 마치 자연을 향한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보여 주시는 창조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떠 있는 모습과(창 1:2), 욥의 세 친구 빌닷(Bildad)의 말에 관한 욥의 대답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홀로 하늘을 펼치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는(욥 9:8)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연의 질서로서 중력의 원리를 뛰어 넘어서 무게가 없는 유령(weightless ghost)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고 풍랑으로 죽음에 직면해 있는 제자들을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지나가려 하신 것입니까?
‘지나가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파레르코마이’(parerchomai: to pass by)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LXX)을 보면 우리는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파레르코마이’라는 동사는 칠입인역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출 33:19, 22; 34:6; 왕상 19: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행하고 있었을 때(출 32:1-6),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있는 모세를 내려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kala: to destory)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출 32:10). 모세는 지속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긍휼의 메시지 가운데에서 ‘지나가다’(abar: to pass through)라는 동사가 ‘구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출 33: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며, 네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내가 은혜 베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 하시고, (바른 성경)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서 역경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용기를 가져라, 나는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막 6:50c)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가운데에서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표현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출 3:14; 사 41:10; 43:11; 45:6, 8; 48:12).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모습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곧 나다”(출 3:14)라고 말씀하셨고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의 메시지에서도 “나 곧 나는 여호와이다.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사 43:11: 바른 성경)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는 제자들에게 주어져서 두려움과 놀람에서 벗어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예수님을 통하여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사 41:10).
밤새 바람과 싸우며 역경을 경험하고 있었던 제자들의 문제는 자연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이 멈추었습니다(막 6:51a). 그러자 제자들은 바람으로 인한 풍랑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고 감사하기보다 예수님의 주권에 관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막 6:51b).
마가는 제자들이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앞에서 놀란 이유를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합니다.
마가는 배를 타고 떠나는 짧은 여행 가운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자연(막 4:35-41)과 귀신(막 5:1-20) 그리고 질병과 죽음(막 5:21-43)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더 나아가서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흩어져 있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들만 숫자를 세었을 때 오천명이 충분히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막 6:43). 그러나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건에 집중하였을 때 그들의 마음은 완악해져서(poroo: to harden) 예수님에 관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함께 나누기>
- 마가복음 4:35-8:26절의 말씀에서 제자들이 배를 타고 움직이는 세 번의 여행은 어떠한 공통점과 연결고리가 있습니까?
-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즉시 분리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걸으시는 모습은 구약 성경의 어떠한 모습과 연결 고리가 있습니까?
- 제자들이 풍랑과 싸우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지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지나가기를 원하다’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나는 나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 제자들의 마음이 완악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