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3), 확신의 파운데이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근본적 요소는 특정 기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확신에 숙달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확신은 그 어떤 방법론 보다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확신이 분명하면, 설교자는 무엇을 어떤 태도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기본적인 통찰력과 그것을 충실하게 행하도록 유도하는 모든 동기를 갖게 됩니다. 기법은 한 개인을 능숙한 웅변가로 만들지만, 믿음의 확신은 설교자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피웁니다. 이 원리는 설교자를 뜻하는 희랍어 “케룩스”에 잘 나타납니다.
설교인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사람인 케룩스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군주의 충신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최 측근으로 왕궁에 거주하는 자로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여받은 전령관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왕궁 안에서는 왕의 수발을 들고 왕의 목욕물을 준비하며, 왕의 말에 마구를 채우고 마차를 몰았지만, 대외적으로는 왕의 심부를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왕의 협력자이며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케룩스는 군주와 깊은 우정적인 관계 맺고 있는 자신의 영광스런 신분에 충성을 다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왕이 맡긴 임무에 목숨을 거는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케룩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신성하며 불가침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분의 보호를 받는 자라는 확신은 전령자에게 깊고 고결한 사명감을 발산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 중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 공회로부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엄한 경고를 받은 자리에서 초기교회 설교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응수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 속에도 동일한 확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바울은 자신을 지켜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대리자로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말씀을 선포하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그 사명을 유지하고, 그리고 그 사명을 지속하도록 이끌어 가는 내면의 힘을 발산케합니다. 그렇다면, 확신의 토대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뿐 아니라 어떤 시대든 변함 없이 기독교 공동체 생활의 생명이며 본질적이 되는 파운데이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확신의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확신,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창조 이후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무대에서 예언, 섭리, 기적, 그리고 가장 탁월하게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알리셨으며, 성경이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계획과 원리를 밝히셨는데, 성경이 그 법칙을 선포합니다. 성경은 어두운 밤과 같은 우리 인생에 등불이 되어 환하게 길을 밝히는 빛, 돌 같은 마음을 깨뜨리는 망치, 쓰레기를 태우는 불, 싹이 탄생하게 하는 생명의 씨앗, 아기가 자라게 하는 젖, 그리고 열매를 맺게하는 기름진 땅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하나님의 대변자인 설교자는 위엄을 지닐 수 있지만, 자신을 과시하 거나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두번째 확신,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눈이 흐리고 귀머거리이며 하나님께 적대적입니다. 생명의 질서에 방종하는 인간은 자기 숭배를 통해 자멸에 빠집니다. 영적으로 풍족해야 할 그들의 영혼은 기근에 굶주리고 있으며, 타락한 그들의 영혼은 잔인하고 짐승 같은 행동으로 선한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창조된 그들은 그분의 뜻에 반항함으로써 스스로 그분의 진노를 자초합니다. 영광을 위해 창조된 그들은 스스로를 지옥에 던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참담한 현실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묘사합니다.
세번째 확신,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으신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피조물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은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행하시는 목적은 변함 없이 동일합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언제까지나 한결 같고, 그분의 뜻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은 예전과 동일합니다.
네번째 확신, “사탄은 활동적이다.” 마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악하고 비열하며, 파괴적인 의도로 끊임없이 약탈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도적에 비교하여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설명합니다. 한 때 사탄에게 속았던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고 조언합니다. 사탄은 파괴하고 죽이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도 일하는 자입니다. 휴 라티머는 영국 전역에서 가장 부지런한 성직자는 사탄이라고 표현한 후에, “그는 휴식 시간에도 자신의 교구를 떠나 본적이 없는 자이며, 빈둥거리는 건달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바쁜 농부다”고 말했습니다.
다섯번째 확신, “하나님의 영은 주권자이시다.” 그의 백성들 안에 계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성령의 일하심이 없다면, 설교는 언제나 무익하고 열매 없는 활동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그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자연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에 열매가 맺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된 믿음의 확신이 가슴에 불타오르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복음과 성경에 담긴 교훈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고 의미 있는 활동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복음을 선포하게 되고, 그곳에는 변함 없이 풍성한 열매가 맺게 될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
설교 (3), 확신의 파운데이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근본적 요소는 특정 기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확신에 숙달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확신은 그 어떤 방법론 보다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확신이 분명하면, 설교자는 무엇을 어떤 태도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기본적인 통찰력과 그것을 충실하게 행하도록 유도하는 모든 동기를 갖게 됩니다. 기법은 한 개인을 능숙한 웅변가로 만들지만, 믿음의 확신은 설교자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피웁니다. 이 원리는 설교자를 뜻하는 희랍어 “케룩스”에 잘 나타납니다.
설교인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사람인 케룩스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군주의 충신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최 측근으로 왕궁에 거주하는 자로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여받은 전령관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왕궁 안에서는 왕의 수발을 들고 왕의 목욕물을 준비하며, 왕의 말에 마구를 채우고 마차를 몰았지만, 대외적으로는 왕의 심부를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왕의 협력자이며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케룩스는 군주와 깊은 우정적인 관계 맺고 있는 자신의 영광스런 신분에 충성을 다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왕이 맡긴 임무에 목숨을 거는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케룩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신성하며 불가침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분의 보호를 받는 자라는 확신은 전령자에게 깊고 고결한 사명감을 발산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 중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 공회로부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엄한 경고를 받은 자리에서 초기교회 설교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응수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 속에도 동일한 확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바울은 자신을 지켜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대리자로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말씀을 선포하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그 사명을 유지하고, 그리고 그 사명을 지속하도록 이끌어 가는 내면의 힘을 발산케합니다. 그렇다면, 확신의 토대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뿐 아니라 어떤 시대든 변함 없이 기독교 공동체 생활의 생명이며 본질적이 되는 파운데이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확신의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확신,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창조 이후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무대에서 예언, 섭리, 기적, 그리고 가장 탁월하게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알리셨으며, 성경이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계획과 원리를 밝히셨는데, 성경이 그 법칙을 선포합니다. 성경은 어두운 밤과 같은 우리 인생에 등불이 되어 환하게 길을 밝히는 빛, 돌 같은 마음을 깨뜨리는 망치, 쓰레기를 태우는 불, 싹이 탄생하게 하는 생명의 씨앗, 아기가 자라게 하는 젖, 그리고 열매를 맺게하는 기름진 땅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하나님의 대변자인 설교자는 위엄을 지닐 수 있지만, 자신을 과시하 거나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두번째 확신,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눈이 흐리고 귀머거리이며 하나님께 적대적입니다. 생명의 질서에 방종하는 인간은 자기 숭배를 통해 자멸에 빠집니다. 영적으로 풍족해야 할 그들의 영혼은 기근에 굶주리고 있으며, 타락한 그들의 영혼은 잔인하고 짐승 같은 행동으로 선한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창조된 그들은 그분의 뜻에 반항함으로써 스스로 그분의 진노를 자초합니다. 영광을 위해 창조된 그들은 스스로를 지옥에 던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참담한 현실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묘사합니다.
세번째 확신,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으신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피조물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은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행하시는 목적은 변함 없이 동일합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언제까지나 한결 같고, 그분의 뜻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은 예전과 동일합니다.
네번째 확신, “사탄은 활동적이다.” 마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악하고 비열하며, 파괴적인 의도로 끊임없이 약탈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도적에 비교하여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설명합니다. 한 때 사탄에게 속았던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고 조언합니다. 사탄은 파괴하고 죽이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도 일하는 자입니다. 휴 라티머는 영국 전역에서 가장 부지런한 성직자는 사탄이라고 표현한 후에, “그는 휴식 시간에도 자신의 교구를 떠나 본적이 없는 자이며, 빈둥거리는 건달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바쁜 농부다”고 말했습니다.
다섯번째 확신, “하나님의 영은 주권자이시다.” 그의 백성들 안에 계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성령의 일하심이 없다면, 설교는 언제나 무익하고 열매 없는 활동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그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자연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에 열매가 맺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된 믿음의 확신이 가슴에 불타오르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복음과 성경에 담긴 교훈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고 의미 있는 활동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복음을 선포하게 되고, 그곳에는 변함 없이 풍성한 열매가 맺게 될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