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 번째 배 여행(막 8:14-26)은 벳새다(Bethsaida)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가 여러 번 생각해 본 것처럼, 마가복음 4:35-8:26절에 기록되어 있는 세 번의 짧은 배 여행에서 첫 번째 여행과 두 번째 여행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사건(막 5:1-43; 6:53-56; 7:24-37; 8:22-26)과 유대인 지역과 이방인 지역에서 행하신 급식 기적(막 6:30-44; 8:1-10)의 순서로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 두 번의 짧은 배 여행을 종합하여서 세 번째 배 여행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빵(artos: loaf)이라는 소재로 연결시키고 있고(막 8:14-21), 그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배치하여서 제자들도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구조적인 틀(framework) 안에서 마가복음 8:22-26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막 1:16:8:21)을 마치시고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서의 가르침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를 출발하여서 여리고에 도착하는 길 위에서(on the way)의 가르침을 마가복음 8:27-10:45절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 처음과 끝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배치하여서 하나의 틀을 구성하고 있고(막 8:22-26; 10:46-52),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새다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 번의 수난 예고(Passion prediction: 막 8:31; 9:31; 10:33)를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지속적인 오해(misunderstanding)를 통하여 제자들의 영적 무능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막 8:32-22; 9:33-34; 10:35-40) (Bas M.F. van Iersel, Mark A Reader-Response Commentary (JSNTSup 16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84).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가셨을 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은 세번의 짧은 배 여행의 마지막 부분임과 동시에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서의 가르침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bridge)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한 벳새다 지역은 갈릴리 바다 북쪽 끝 요단강 하구에 위치한 도시로 벳새다 서쪽에 위치한 가버나움(Capernaum)과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벳새다는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의 고향이었으며(요 1:44; 12:21), 헤롯의 아들 중 빌립의 관할 지역이었습니다. 벳새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두 번째 짧은 배 여행의 목적지였지만 갈릴리 바다에서 만난 역풍으로 인하여 벳새다에 가지 못하고 게넷사렛 지역에 정박하였는데(막 6:45, 53),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가신 이유는 두 번째 짧은 배 여행의 의도성이 완성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바다를 기준으로 서쪽에는 유대인들이 중심적으로 살고 있었고, 동쪽에는 이방인들이 중심적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러한 배경은 두 번째 배 여행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 사역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아직 이방인 지역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새다에 도착하였을 때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를 만져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막 8: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예수)에게 눈먼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를 만져 주시도록 그(예수)에게 간청했습니다. (23) 그러자 그(예수)는 눈먼 사람의 손을 붙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24) 그리고 그가 위를 보며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마치 나무처럼 걷는 [사람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25) 그리고 나서 그(예수)가 다시 그 사람의 눈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명히 보기 시작했고, 회복되어서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26) 그리고 그(예수)가 그의 집으로 그를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Translated by YG Kim)
1세기 문화 가운데에서 치료자가 병자를 만지는(hapto: to touch) 접촉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치유 방법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만져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손을 잡아 일으켜 치료해 주셨고(막 1:31), 악성 전염성 피부병을 앓고 있던 사람도 손을 내밀어 만져 치료해 주셨습니다(막 1:41). 또한 야이로의 딸도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막 5:41). 이와 반대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고침을 받았고(막 5:30), 이러한 믿음의 행동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의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는 이유가 되었습니다(막 5:34).
사람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가장 큰 이유는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사건과 기적으로 인하여 벳새다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21절과 누가복음 10:14절에서 벳새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마을 중에 하나였습니다. 벳새다가 두로와 시돈과 더불어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의 치유 사건과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치료해 주신 이유는 메시아의 비밀 가운데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권능이 벳새다 사람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고 난 후에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막 8:26).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함께 읽어가면서 깨닫는 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 단계로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두 단계를 통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두 단계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모습은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 중에 하나인 제자들이 영적 무능력과 잘못된 메시아 모습이 점진적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첫 번째 단계는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ptow: to spit) 손을 얹는(epithemi: to lay upon) 단계입니다(막 8:23). 첫 번째 단계의 치유 사역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보이느냐”(막 8:23)라고 질문하셨고, 이 사람은 마치 나무처럼 걷는 사람을 본다고 이야기 합니다(막 8:24).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사건들 가운데에서 환자의 상태를 예수님께서 직접 물어보시는 모습은 벳세다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치유 사건이 유일합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점진적 치유 과정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영적 이해도 점진적으로 밝아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비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막 1:1)이라는 사실은 귀신 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선포 되었고(막 1:24, 3:11, 5:7),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를 잔잔하게 하시고(막 4:35-41),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시고(막 6:45-52),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막 6:30-44)과 빵 일곱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막 8:1-10)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시각 장애인이 첫번째 치료를 받았을 때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나무와 같이 뿌옇게 보이는 모습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 다시 손을 얹으셨고, 그는 선명히 보기 시작했고(diablepo: to see clearly), 회복되어서(apokathistemi: to restore) 모든 것을 분명하게(telaugos: clearly) 보았습니다(emblepo: to look at)(막 8:25).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직접적으로 듣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자들로 상징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서기관들(막 3:22-23)과 바리새인과 헤롯(막 8:10-13), 그리고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막 4:11-13)에서 발견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막 1:16-20; 3:13-19), 전도 사명을 받았으며(막 6:7-13), 사적인 공간에서 예수님의 비유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막 4:10-13, 33-34;7:18-23) 예수님 안에 있는 내부자들(insiders)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고(막 4:10, 13, 41; 6:37, 52; 7:17; 8:4), 결과적으로 예수님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로 책망을 받았습니다(막 8:18). 제자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무지함을 가지고 있는 회복의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 또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분명하게 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마가복음 8:22-26절에서 ‘보다’(blepo: to see)라는 동사의 어원은 접두어(prefix)의 변화를 가지고 다섯 번 사용이 되는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료의 완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가는 25절 마지막에 사용이 된 ‘엠브레포’(emblepo: to look at)라는 동사를 부정 과거(imperfect) 시제로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 두 번째 손을 얹어 놓으신 시점을 기준으로 지속적으로 현재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비밀 가운데에서 앞을 보지 못했단 사람이 치료되어서 집에 보내실 때 비밀 유지 명령(secrecy command)의 변형된 형태로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막 8:26).
마가는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벳새다에서 여리고로 출발하는 시작점과 끝에 배치하여서 제자들도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을 선명하게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 이후에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후에 깨닫게 됩니다.
<함께 나누기>
- 마가복음 8:22-26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짧은 배 여행의 끝이면서 동시에 마가복음 8:22-10:52의 구조에서 처음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마가복음 8:22-10:52의 구조를 짧게 설명해 보세요.
- 벳새다 지역에 관하여 설명해 보세요.
- 1세기 문화 가운데에서 치료자가 병자를 만지는 행동은 치유의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따로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 단계에 거쳐 점진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치료하신 과정과 두 번째 예수님께서 치료하신 과정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떠한 치료의 차이점이 있었습니까?
-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 단계로 고쳐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과정이 제자들의 영적 무지와 연결이 되어져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흐릿하게 보고 있습니까? 선명하게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선명하게 보고 있다면, 복음에 관하여 설명해 보십시오.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