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예복의 종교적 위선과 두 렙돈의 진실
마가복음 12장 28-34절에서 등장하는 한 서기관은 예수님의 비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모습(막 12:24-27)을 보고, 진지한 배움의 자세로 다가와 율법을 질문한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2장 38-40절에서 예수님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서기관들은 실제적인 경건보다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져 사회적 명예와 외적인 과시에 집착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긴 예복을 입고 걸어다니며 시장에서 인사를 받는 것을 원했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연회의 특별한 자리를 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악용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며, 종교적 외식으로 경건을 드러내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서기관들의 행위를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과부의 집을 삼켜버리는 자들과 종교적 외식을 하는 자들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막 12:38-39) 그리고 그의 가르침 가운데 그(예수)가 말씀하셨습니다. “긴 예복을 입고 걸어다니기를 원하고,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원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앉기를] 원하고, 연회에서 특별한 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경계하라. (40) 과부들의 집을 삼켜버리고,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경건한 척 길게 기도하는 자들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세 가지 잘못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경계하다”(blepo: to beware of)라는 헬라어 동사는 ‘보다’(horao: to see) 동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보는 행동이 지적 인지와 주의력에 영향력을 미침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는 ‘주목해서 바라보다’라는 의미인 ‘브렙포’(blepo) 동사를 분리 전치사 ‘아포’(apo: from)와 결합해서 ‘경계하다’라는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12장 38-39절에서 세 가지 서기관들의 잘못된 행동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잘못된 행동은 서기관들이 긴 예복(stole: long rob)을 입고 걸어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이 입고 다녔던 긴 예복인 ‘스토레’(stole)는 단순한 의복을 뛰어 넘어 그들의 사회적·종교적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길고 흘러내리는 겉옷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경 성경(LXX)을 보면 ‘스토레’는 이 옷을 입고 있는 자의 직분을 나타냈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들이 입었던 ‘거룩한 옷’(stole hagia)처럼(출 28:2, 3, 4, 40:13), ‘스토레’는 특정한 신분을 나타내는 공식적인 예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스토레’를 입고 일상의 삶 속에서 시장이나 회당, 그리고 연회장에 참석하는 모습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스토레’라는 긴 예복을 통해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드러내며 허영심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행동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서기관들이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기관을 보면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존경의 표시로 모두가 함께 일어나서 “Rabbi,” “Father,” 또는 “Master”라고 불러야 했습니다(R. Alan Culpepper, Mark, 2007, Smyth and Helwys, p. 425). 서기관들이 시장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멈추고 서기관들에게 지속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긴 예복인 ‘스토레’를 입고 시장에 가는 행동이, 종교적 위선과 허영심에서 비롯된 위선임을 책망하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이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모습과, 연회에서 특별한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모습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그들의 허영심과 종교적 명예 그리고 잘못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회당에서 회중을 마주 보고 토라(Torah) 두루마리 궤를 등지고 앉는 ‘높은 자리’(protokathedria: the seat of honor)에 앉음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려 했습니다. 또한 잔치에서도 자신의 계급과 지위에 따른 ‘특별한 자리’(protoklisia: the place of honor)를 차지하여 사람들로부터 경의와 인정을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는 교만한 태도였고,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해 본 것처럼, 벳새다에서 여리고로 오는 길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만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낮은 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막 9: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의 허영심과 잘못된 종교적 위선은 탐욕으로 연결되어서 사회적 약자에 해당되는 과부들의 집을 삼켜버리는 행동과 종교적 위선으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향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막 12:40c)라고 경고하십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들에게 있어서 ‘집’(oikos: house)은 단순한 주거 건물이 아니라 과부가 남편에게 상속받은 모든 재산과 유산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켰다’(katesthio: to devour)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부들의 집을 착취했는지 말씀하고 계시지 않지만, 학자들은 크게 네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첫째, 서기관들이 과부들에게 율법 자문이나 유산 상속 절차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수수료를 챙기는 방법입니다(Joel Marcus, Mark 8-16, The Anchor Yale Bible 27A, Yale University Press, p. 855).
둘째, 서기관들이 과부들의 재산의 신탁 관리자(trustee) 역할을 하며 그 재산을 부당하게 유용하는 방법입니다(Robert H. Stein, Mark, Baker Academic, 2008, p. 575).
셋째, 서기관들이 과부들에게 성전에 바치는 헌금을 하도록 과도하게 강요해서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는 방법입니다(Joel Marcus, Mark 8-16, The Anchor Yale Bible 27a, Yale University Press, p. 856; See also Josephus, The Antiquities of the Jews 20.10.1 §206).
넷째, 서기관들이 과부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내는 방법입니다(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The Anchor Yale Bible 28A, Doubleday, 1985, p. 1318).
또한 서기관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목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거리에서 자신을 경건한 인물로 과시하려는 ‘거짓된 경건’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자 했습니다(막 12:40b).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을 저버린 채, 거짓된 경건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서기관들에게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심판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심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AD 70년 로마의 장관 티투스(Titus: Titus는 AD 79년 로마의 황제가 되어서 81년까지 통치함)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도래할 유대 종교 체제의 종말과 몰락을 역사적으로 예언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8-40절의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은 ‘과부’(chera: widow)라는 단어를 통해 12장 41-44절의 본문과 유기적 연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가지 사건을 통해 서기관들의 악한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됩니다.
(막 12:41) 그리고 그(예수)가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돈을 넣는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자들이 많이 넣었습니다. (42) 그리고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을 넣었는데, 그것은 한 고드란트입니다. (43) 그리고 그(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속한 풍족함 가운데에서 넣었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부족함 가운데에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 곧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의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함(gazophylakion: receptacle)에 돈을 넣는지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의 맞은편에 앉아 헌금하는 자들을 지켜보는 행동은 구약적 배경에서 재판 행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LXX 삿 4:5; 단 7:9-10).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있었는데, 유대교의 구전 율법을 해석하는 ‘미슈나’(Mishnah)의 ‘쉐칼림’(Shekalim: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정과 성전세를 다루는 문헌) 6장 5절을 보면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irteen collection chests were in the Temple, upon which were inscribed [respectively]: “New Shekalim” and “Old Sheka-lim”; “Nests” and “Young Pigeon Burnt-Offerings”; “Wood” and “Frankincense”; “Gold for the Utensils”; [the remaining] six [were used] for [various] donative-offerings.”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풍족함 가운데에서 많은 헌금을 하는 모습에 집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과부 중에 한 명이 헌금함에 두 렙돈(Lepton)을 넣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칭찬하십니다.
먼저 렙돈은 예수님 당시 유통되었던 가장 작은 가치의 동전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 렙돈이 한 개의 고드란트(Quadrans)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denarius)인데, 한 개의 고드란트는 한 데나리온의 1/64에 불과한 가치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마태복음 10장 29절에 기록되어 있는 참새 두 마리의 가치인 한 앗사리온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당시 화폐 가치를 계산하면 ‘1앗사리온 = 4고드란트’이므로, ‘1고드란트 = 2 렙돈’입니다. 따라서 참새 두 마리는 ‘8 렙돈’이고, 참새 한 마리는 ‘4렙돈’입니다. 결과적으로 ‘두 렙돈’은 ‘참새 반마리’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학자들은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의 희생적 헌신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는 견해입니다(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Eerdmans, 2002, p. 493). 두 번째는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까지 착취하는 부패한 성전의 헌금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견해입니다(Craig Evans, Mark 8:27-16:20, WBC 34B, Thomas Nelson, 2001, p. 282).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과부의 전적인 사랑을 인정하시는 동시에, 그 여인의 생명줄까지 빼앗아 가는 성전 체제의 모순을 이중적으로 고발하고 계십니다.
성전에 드리는 헌금의 액수로 생각해 보면, 두 렙돈은 참새 반 마리의 가치에 불과한 너무나도 적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비(bios: resources needed to maintain life)의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다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 자체를 드리는 헌금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드리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보호망이 되어야 할 성전 체제의 비참한 실상을 고발하십니다. 성전이 오히려 가난한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강도의 소굴’(막 11:17)이 되어버린 성전의 실상을 말씀하신 것처럼, 서기관들이 과부의 집을 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난한 자의 마지막 생명줄과 다름없는 생활비조차 빼앗아 가는 성전의 탐욕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난한 과부에게는 위대한 칭찬을 동시에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과 부패한 성전 체제에 대해서는 엄중한 심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함께 나누기>
-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들의 세 가지 잘못된 행동은 무엇입니까? 각각의 특징을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이 과부의 집을 삼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은 행동 자체는 당시 성전의 헌금 제도에 관한 예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 교회는 헌금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서기관들이 과부의 집을 삼키는 모습이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화려한 예배당과 목회 사역 이면에도 과부의 마지막 온기마저 삼켜버리려는 서기관의 탐욕이 숨어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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