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 가난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일상의 네 때
교회는 그 문을 ‘밥상’으로 연다.
교회가 가난을 다룰 때 흔히 두 가지 시선을 놓친다. 하나는 ‘불쌍함’이라는 시선, 다른 하나는 ‘성과’라는 시선이다. 불쌍함은 사람을 아래에 두고, 성과는 사람을 숫자로 만든다. 마음이 선해도 그 시선은 쉽게 관계를 망친다. 돕는 쪽은 모르게 ‘위에서’ 말하게 되고, 도움을 받는 쪽은 모르게 ‘아래에서’ 숨게 된다.
여기에서 히브리 전통이 품은 단어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쩨다카(צדקה).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자선’이나 ‘구제’로만 좁혀 부르지만, 쩨다카의 중심은 훨씬 단단하다. 쩨다카는 “불쌍해서 주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바로 서야 할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의로움”에 가깝다. 그래서 쩨다카는 단지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마음과 방식이 바뀌는 실천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다시 존엄을 회복해 공동체 안에 자리 잡도록 길을 내어 주는 것. 그가 ‘받는 사람’으로 고정되지 않도록, ‘필요한 사람’으로 서도록 곁을 내어 주는 것. 쩨다카는 베풂과 책임이 함께 들어 있는, 조금 더 무겁고 아름다운 단어다.
168시간의 예배
미래교회의 트렌드를 말하면서 왜 가난을 이야기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168시간의 예배가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틈새’이기 때문이다. 삶이 매끄러울 때는 주일 1시간으로도 버틸 수 있다. 예배당에서의 감동이 며칠은 가고, 마음도 비교적 정돈된다. 그러나 삶이 갈라질 때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신앙이 없으면 무너진다. 가난의 틈새는 냉장고 앞에서 열리고, 공과금 고지서에서 드러나고, 아이의 급식비가 밀리는 날에 더 선명해진다. 그 틈새 앞에서는 신앙적 수사가 얇아진다. “믿음으로 이기세요”라는 말이 진실이 되려면, 그 말이 월요일 아침의 식탁과 화요일 오후의 카드 명세서까지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주일의 빛’이 ‘주중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가난의 틈새는 복음의 접점이다.
D6의 네 때
여기서 D6의 네 때는 실감이 된다. 일어날 때,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웠을 때. D6는 신앙을 ‘강당’에 가두지 않고 ‘일상’에 새기도록 부른다. 일어날 때는 ‘오늘도 주께서 공급하신다’는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 공급은 넉넉함을 보장하는 주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언약의 확인이다. 집에 앉았을 때는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정직함이다. 어떤 날은 식료품일 수 있고, 어떤 날은 시간일 수 있고, 어떤 날은 병원에 함께 가 주는 동행일 수 있다. 길을 갈 때는 ‘그 집의 이름’을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이름을 부르면 기도는 추상에서 현실로 내려온다. 지나칠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 선택은 종종 길 위에서 결정된다. 누웠을 때는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은 흔히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만들지만, 복음의 환대는 그 경계를 느슨하게 한다. 우리는 나누며 주지만, 동시에 배우며 받는다. 쩨다카가 공동체를 살리는 이유도 여기 있다. 쩨다카는 받는 사람의 존엄을 세우는 동시에, 주는 사람의 교만을 낮춘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자리를 다시 배우게 한다.
939주(18년)의 이야기
가정은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에게 ‘나눔’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의가 아니라 목격이다. 엄마 아빠가 누군가를 위해 밥 한 그릇을 준비하는 장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장면,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문을 여는 장면. 아이는 그 장면에서 하나님을 배운다. 그래서 939주(18년)의 이야기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부모와 함께 둥지에 머무는 그 긴 시간 동안, 신앙은 ‘설명’보다 ‘삶’으로 전수된다. 아이의 기억에는 교리 문장보다, 갈등을 풀던 말투와 함께 기도하던 손등의 온기가 먼저 남는다. 가난의 틈새를 마주한 자리에서 부모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도와주고, 어떻게 기도하는지. 그 장면들이 아이의 신앙 지도를 만든다. 결국 미래교회는 예배당의 웅장한 장면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의 기억 속에 쌓이는 ‘작은 의로움의 장면’들로 만들어진다.
우리 시대의 교회
그래서 교회의 구제는 봉사 프로그램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가정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환대의 구조가 있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한 끼를 함께 먹는 것. 필요하면 조용히 식료품을 나누는 것. 외로운 이웃을 병원에 동행하는 것. 이런 움직임은 거대한 예산보다 관계의 용기를 요구한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큰 행사로 감동을 주는 교회’보다 ‘작은 환대로 존엄을 세우는 교회’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 그 환대는 무대 위가 아니라 부엌에서, 주보 속이 아니라 냉장고 앞에서, 예배당이 아니라 골목길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 신앙은 결국 동네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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