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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칼럼 김치남 목사의 하나님의 교육명령 제10회. 부흥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칼럼: 하나님의 교육명령] 제10회. 부흥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제10회. 부흥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아침에 식탁에 앉아 성경을 펴는 아버지가 있다. 아이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다. 아버지가 성경 한 절을 읽는다. 아이는 창밖을 보고, 물을 마시고, 가끔 하품도 한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사진을 찍어 주지도 않는다. 박수도 없다. 아버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늘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에 손을 한번 얹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요즘 이런 장면을 오래 생각한다. 어쩌면 부흥은 이런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부흥을 생각하면 큰 것을 먼저 떠올린다. 큰 집회, 많은 사람, 뜨거운 찬양, 눈물의 기도, 강한 설교. 한국교회는 분명 그런 부흥을 경험했다. 새벽을 깨우는 기도가 있었고, 산에서 드린 기도가 있었고, 가난 속에서도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보낸 세대가 있었다.

그 믿음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 뜨거움은 어디까지 갔는가

  예배당을 넘어 집까지 갔는가. 강단을 넘어 식탁까지 갔는가. 부모의 가슴을 넘어 자녀의 마음까지 갔는가. 그리고 그 자녀가 다시 자기 자녀에게 믿음을 건네게 되었는가. 이 질문 때문에 지난 아홉 번의 글을 썼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왜 부흥이 다음세대로 건너가지 못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부모를 보았다. 가정을 보았다.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라는 평범한 네 때를 보았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목회 구조를 돌아보았고, 교회와 가정의 동역을 다시 생각했다. 다음세대 사역이 왜 부모세대 사역인지 물었고, 수련회와 부흥회의 은혜가 어떻게 일상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도 이야기했다. 돌아보면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끊어진 것을 다시 잇는 일.

  주일과 주중을 잇는 일. 교회와 가정을 잇는 일. 목회자와 부모를 잇는 일. 부모와 자녀를 잇는 일. 한 세대와 다음세대를 잇는 일. D6는 새로운 것을 더하는 운동이라기보다, 본래 이어져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잇는 운동에 가깝다.

  부흥도 마찬가지이다. 부흥은 얼마나 크게 일어났는가보다 얼마나 멀리 이어졌는가가 중요하다. 한 번 크게 타오르는 불은 강렬하다. 그러나 오래 남으려면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 불을 다른 등불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믿음을 건네고, 자녀가 그 믿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자기 자녀에게 건넬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부흥은 사건을 넘어 계승이 된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하나님은 정말 계셔?”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춘다. 예전 같으면 얼른 정답을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대답한다. “아빠도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있어. 우리 같이 찾아보자.” 나는 이런 장면도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답을 가진 부모가 아니라, 자녀와 함께 하나님을 찾는 부모. 실수하지 않는 부모가 아니라, 실수했을 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부모. 자녀에게 화를 냈다면 “아빠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부모. 비교하고 몰아붙였다면 “엄마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부모. 부모의 이런 회개는 긴 설교보다 오래 남을 수 있다. 

  신앙은 완벽함을 보여 주는 일이 아니다. 다시 돌아오는 길을 보여 주는 일이다. 그래서 가정은 부흥의 중요한 자리가 된다. 식탁에서. 차 안에서. 잠자리에서. 평범한 하루 속에서. 신앙은 설명되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달라져야 한다.

  교회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구조에서 사람을 세우는 구조로 가야 한다. 좋은 목회자는 자신이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제자로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이다. 좋은 교사는 아이를 대신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 한 아이 곁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다. 좋은 교회는 많은 프로그램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많은 제자를 세우는 교회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큰 사람을 기다렸다. 좋은 목회자 한 분이 오면 교회가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명한 강사가 오면 아이들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물론 그런 일도 있다. 그러나 세대 간 부흥에는 또 다른 그림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이끄는 그림이 아니라, 천 명이 각자 자기 곁의 한 사람을 세우는 그림. 아버지가 한 자녀를 세우고, 교사가 한 학생을 세우고, 목회자가 한 가정을 세우고, 한 성도가 또 한 사람을 오래 품는 그림이다.

  이런 사역은 화려하지 않다. 사진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 간다. 나는 부흥을 생각할수록 등불을 떠올린다. 등불 하나는 작다. 그러나 다른 등불에 불을 옮길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등불에 옮길 수 있다. 처음 불을 붙인 사람이 사라져도 빛은 남는다. 세대 간 부흥도 그렇다. 그래서 D6는 부흥을 크게 만들려는 운동이 아니다. 부흥은 더 이상 한 시대의 추억도 아니다. 연재(D6는 왜 세대 간 부흥운동인가?)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남기고 싶다. 

부흥은 부모세대가 먼저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믿음이 가정과 교회를 지나 다음세대의 고백이 될 때, 비로소 세대 간 부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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