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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성령 (8) “슬퍼합니다.”

성령 (8) “슬퍼합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성령이 개성을 소유한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인간이 그분께 범할 수 있는 죄에 의해 제공됩니다. A. B. 심슨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축복의 가장 높은 가능성을 성취하는 데 자신의 온 마음을 두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지혜롭고 거룩한 뜻에 굴복하지 않을 때, 그분이 우리를 교육하고 틀을 잡고 세상에서 분리시키도록 우리가 허락하지 않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영광의 중대함에 적합하지 않았을 때, 그분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그분의 사랑은 상처를 받았고, 그리고 그분의 목적은 좌절되었습니다. 만약 보혜사가 울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눈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드러운 얼굴에 사랑의 슬픔이 드리워져 있슴도 볼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 때문에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은 그분이 인격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개척된지 얼마 되지 않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심지어 성령은 억압당하기도 합니다. 회심이후 평생을 성령과 함께 생활하여 그분의 인품을 소상히 살폈던 바울은 압제 당하는 성령을 발견합니다. 그 성령을 불로 비유하여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설명합니다. 언어 학자 조셉 세이어는 “소멸하다”는 희랍어에 “억제하다” 또는 “억누르다”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간 삶의 어떤 태도는 성령의  불꽃을 억눌러서 그 활동을 중단시킵니다. 내려오는 전통에 집착하는 신앙 생활은 성령의 활동을 억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성한 질서를 의도적으로 떠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성령께 슬픔이 됩니다. 부드러운 성령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우리의 의지로 성령을 쫓는 것보다 다른 것을 선택할 때 그분은 슬퍼하시며 우리 삶에 활동은 중단 됩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불이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처음 임할 때의 모습을 성경은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니”라고 묘사합니다. 그 때 제자들의 입술이 열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능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이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은 문자 그대로 뜨거운 성령으로 끓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의 변화는 새로운 힘에 대한 의식을 일깨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며,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고, 성경에 관한 새로운 통찰력이고, 인간 삶에 관한 새로운 의미이며, 자주 불타는 새로운 힘, 그리고 열정적인 새로운 설교였습니다. 성령이 임한 고린도 교회는 원조 교회 회중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 중에 잠잠한 자는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처럼 성령의 나타남은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었으며 모든 열정과 불꽃이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린 성도들의 사역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은 전통과 형식에 집착하는 사람들과의 충돌입니다.   자신이 경험이 많고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오랜 종교인들은 성령으로 타오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불편해 하며 “자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교회 안에 질서를 위해 성령의 자유가 즉각 억압되었습니다. 결국 성령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사역을 지나치게 통제하여 성령을 소멸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오스왈드 센더스는 는 오늘날도 성령을 소멸하는 태도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우리는 봉사나 간증에 대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거나 신성하게 열린 기회의 문에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사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방법이 영적인 방법으로 대체될 때, 사람의 칭찬이 하나님의 찬양보다 더 우선될 때, 봉사가 하나님의 지시보다 스스로 시작되었을 때, 성령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새로 불을 붙일 때는 연기가 가장 많이 난다는 진리는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연기를 제거하는 방법은 불에 찬물을 붓는 것이 아니라 불이 저절로 타도록 하는 것입니다. 열정이 불처럼 타오르는 성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기, 즉 선한 것에 대한 성도의 열정은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태도가 성령을 소멸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슬프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인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비극적인 습관을 형성하지 않도록 생각과 언행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슬픔”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적을 화나게 할 수는 있어도 그를 슬프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슬퍼할 수 있고, 사랑이 깊을수록 슬픔도 더 커집니다. 우리가 천 번의 실수로 하나님을 슬프게 해도,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하게 대하십니다. 성령을 슬프게 하는 출발점은 그분의 내주하심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인은 성령이 없는 것처럼 삽니다. 이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그리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자신들의 삶에 하늘의 손님인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시당하는 것을 고마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 바울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생활방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열거했습니다. 그것은 화해를 거부하는 악독과, 이기적인 이유로 성급히 화를 내는 노함과, 신자들 사이에 조화와 연합을 파괴하는 증오의 태도인 분냄과, 자신들의 불평을 알리려고 의지적으로 행하는 떠드는 것과, 거짓말이나 험담의 유포로 다른 사람의 명성을 파괴하는 훼방하는 것과, 그리고 상대방이 선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행하는 악의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죄는 부드러운 성령을 깊은 슬픔에 빠뜨립니다.  그분이 무시당하고, 방해받고, 불순종 당했을 때, 또한 하늘의 새로운 계시를 나타내 줄 사람이 없을 때,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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