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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하나님의 다스리심(시편 145장 8-13절)_밴쿠버한인장로교회 김대희 목사

시편 145장 8-13절 하나님의 다스리심

밴쿠버한인장로교회 김대희 목사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 글에서 스펄전 목사님은 믿음을 지식과 동의, 그리고 신뢰라는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합니다.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면, 어떤 대상에 대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이 먼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안에서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른 지식 위에서 믿음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동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발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동의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믿음의 세번째 요소는 신뢰입니다. 믿음의 단계에서 신뢰는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구주 되심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주님께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맡기고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설명하는 믿음에 대한 설명이 ‘완벽한 정답입니다’ 라는 의미로 이 설명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고 참고가 될 만한 많은 설명들이 존재합니다. 믿음에 관한 수많은 설명들과 이해들이 있겠지만, 지금 이 시간 강조해 드리고 싶은 부분은 나의 생각이나 이해를 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고백과 신앙의 실천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과 동의, 그리고 신뢰라는 믿음의 요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바른 믿음의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장 6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며,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장 12절의 말씀에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의 고백과 경배의 삶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모세)와 함께 하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먼 조상의 하나님에 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해가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 함께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의 고백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바른 믿음의 고백을 드린 다는 것은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믿음의 고백’을 드린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은혜의 삶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할 수 있었던 우선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그들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삶을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모세의 하나님이 되심을 선포하시며, 또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깊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단순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고 또한 어떻게 그들의 삶의 문제를 다스리셨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감사와 찬송의 시의 일부입니다. 본문 말씀이 속한 시편 145편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다윗의 시로 알려진 시편 145편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감사하는 찬송의 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드린 이 찬송시를 통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인식과 감사의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시편 145편의 다윗의 찬송과 같이 우리의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신뢰와 은혜의 고백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신뢰하며 살아감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인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강조했던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가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칼빈의 신학에 큰 영향을 받은 목회자로서 그에게 한가지 특별한 이력이 있는데, 그는 네덜란드의 수상을 역임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수상을 역임한 목회자로서 카이퍼의 신앙과 신학에서 특별한 강조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책이 한국말로는 ‘영역주권’이라는 우리에게는 조금 익숙하지 않은 표현의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영역주권’이라는 책을 통해 카이퍼는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선포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스포츠 등의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역이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카이퍼는 인간의 삶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삶의 영역의 단 1cm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음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삶의 영역을 수치로 계산하여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처럼, 우리는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다윗이 드린 이 시편 145편의 고백처럼 나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8절과 9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십니까?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신뢰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지난 가을 화제가 된 뉴스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 보수당의 대표로 영국의 총리가 된, 리시 수낵에 관한 뉴스였습니다. 영국에서 최초로 백인이 아닌 인물이 총리가 되어 화제가 되었고, 또한 억만장자로 영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라 더욱 화제가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총리가 되자마자 저의 큰 관심을 끈 뉴스는 그가 명품 구두를 신고, 수천 달러의 옷을 입고 빈민촌을 방문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수낵 총리의 재산이 1조원이 넘는다고 하니까 명품 구두나 수천 달러 가치의 정장을 입는 것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한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총리가 빈민가를 방문하면서 굳이 명품 구두를 신고 값비싼 정장을 입어야 했느냐가 뉴스의 요지였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 뒤, 수낵 총리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노숙인들에게 급식봉사를 하는 자리에서 또 한 번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노숙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봉사를 하면서 한 노숙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직장 있어요?” 라고 물어본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저는 그의 가장 큰 문제는 공감능력의 부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빈민촌에 방문하고 노숙인들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많은 국민들의 아픔과 함께 하겠다는 뜻이겠지만, 그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데 있어서 많은 부족함이 느껴졌습니다. 국민의 아픔을 이해하고 품을 심성이나 자질이 없는 사람에게 좋은 정책이나 정치적인 헌신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깊이는 서로의 마음에 대한 공감의 거리만큼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살피고 서로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이해를 할까요?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부모님과 자녀들, 사랑하는 가족의 마음에 공감한다고 할 때, 어디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십니까? 사랑하는 가족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할 때, 단지 나의 배우자 또는 나의 자녀의 아픔을 안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완전한 공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공감’은 무엇이었나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시지 않으시고 죄인의 자리로 내려 오셨습니다. 앞서 설명 드렸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설명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싶습니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영역에는 단 1cm의 빈틈도 없다는 취지로 설명하지만, 저는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고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와의 거리가 단 1cm의 간격도 떨어지지 않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심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심에도 죄인의 자리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때,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흔히 동정심이라고 해석하는 Compassion은 예수님의 자비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때, 너무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아픔의 자리까지 함께 하시는 사랑을 기본으로 합니다. 이미 제가 여러 차례 설명 드렸지만,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그리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실 때, 먼저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불쌍히 여기시다’라는 말은 심장, 폐, 간과 같은 인간의 내장을 의미하는 데, 불쌍히 여김이 몸의 장기로 느껴지는 Compassion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아픔에 장기가 뒤틀려 지는 듯한 아픔으로 공감하시고 죄인들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들의 자리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신 은혜의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오셨고,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사랑과 은혜로 다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단 1cm도 떨어지지 않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다스려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리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의 아픔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그 아픔의 문제로부터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피시고,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아픔의 자리에 함께 하시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 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시편 145편 13절 말씀은 “주의 나라는 영원하며,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구원의 뜻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다스려 주시고, 영원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의 깊은 죄악의 문제, 삶의 여러 아픔과 고통, 그리고 절망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삶의 자리로부터 단 1cm의 간격도 떨어져 있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에 함께 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완전하신 뜻 가운데,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앞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보는 신앙안에서 내 삶을 그리고 내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시며, 주를 찾는 믿음의 고백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의 문제를 다스리시고 계시는 하나님만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들의 믿음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며, 저희들의 삶을 다스려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게 하시고, 영원한 주의 나라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따라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기에 우리가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안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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