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아! 그런뜻이었구나 오만함 (1), “질투의 화신” 

[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오만함 (1), “질투의 화신” 

오만함 (1), “질투의 화신” 

희랍어 “후브리스”는 자연 상태인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한 낱말입니다. 고대 희랍어 사전에 이 낱말의 뜻을 “난폭함,” “욕망,” “무례함,” “모욕,” “교만,” “상해,” “수치스런 대우” 등으로 설명합니다. 후브리스에서 파생된 “후브리스테스”는 자신의 능력을 죄악스럽게 과대 평가하고, 자신의 주장을 과장하며 신과 인간에 대한 말과 행동에 있어서 무례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은 이 낱말을 오만한 자로 번역하고, 신약에서는 인간의 야만적인 태도를 기술할 때 사용합니다.

   고대 희랍어를 연구한 버그 (Burgh)는 후브리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낱말의 근본 의미는 신들과 인간의 불문율을 짓밟는 도 넘는 폭력, 오만함의 극치, 그리고 인간의 거만함이다.  후브리스는 희랍어 ‘죄’와 거의 같은 뜻이다. 이 낱말의 제일 특징적인 적용은 마치 악마에 사로잡힌 것처럼,  통제할 수 없는 자기 주장으로 개인이나 국가를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권력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갈증이다. 이 맹목적인 욕망은 개인의 자유와 공적인 법을 모두 무시하고 파괴를 향한 광란의 자신감으로 피해자를 유인한다.  그것은 신들과 그의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의로운 분노의 감정인 네메시스 (천벌)를 유발한다.” 후브리스는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을 망각하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무자비하게 경시하는 인간의 오만한 태도인 후브리스는 신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것은 고전 희랍 문학과 역사에 인간을 향한 신들의 시기와 질투가 흐르는 이유입니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명저 『역사』는 그리스를 침공하려는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의 계획을 저지하려는 아르타바투스의 경고문을 기록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그의 벼락으로 가장 큰 동물들을 어떻게 치시고, 그들이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반면, 작은 동물들에게는 결코 그의 진노를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이미 알고 있소. 당신은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건물과 나무에 그의 화살을 어떻게 던지는지도 알고 있소. 위대함의 관점을 초과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라내는 것이 하나님의 관습이기 때문이오. 이와 같이 강한 군대라도 작은 군대에 의해 파괴될 수 있소. 하나님께서 질투를 내시면 갑작스런 공황이나 번개로 그들을 쳐서 그들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가치는 멸망시키기 때문이오. 하나님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높은 생각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파라오 아마시스가 해적 폴리크라테스에게 보내는 경고 편지에도 동일한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의 큰 성공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네가 아는 것처럼 신성한 존재들은 모두 질투가 있는 것처럼 나도 그렇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내가 돌보는 모든 사람들이 일생을 통해 항상 성공하는 것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번갈아 경험하는 것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나무 뿌리와 가지가 마지막까지 비참하게 멸망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항상 성공한 사람에 대해 아직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의 삶의 이면에는 성공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성공은 신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신 속에는 크게 성공하고, 너무 많은 행운이 따르고, 좋은 것이 너무 많고, 그리고 너무 많이 승리하는 것은 재난을 초래하는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명 궁수로 알려진 판다로스는 “제우스처럼 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것이 적합하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는 또한 “누군가 부를 소유하고 아름다움에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며 전쟁의 게임에서 힘을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다면, 자신의 옷은 영원하지 않은 한 조각이며, 삶의 마지막에는 흙이 그의 옷이 되는 것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이 인간이 높은 세계에 이르는 것을 두려워 했던 이유는 “신들의 질투”라는 이상한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은  인간의 모든 행복, 모든 번영, 그리고 모든 성공에 대하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간의 친절과 명예에 대한 공정한 평판조차도 신들이 인간을 질투하고 싫어하는 요건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질투에 대하여 상당히 많이 언급합니다. 모세오경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를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역사서와 선지서그리고 시편의 여러 곳에서  “여호와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그 출발이 진노이든 자비이든 언제나 하나님의 행동을 위한 동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이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시편 79편의 저자는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 원인을 “주의 질투가 불붙듯 ” 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언제나 행위로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존 칼빈은 십계명 중 제 2 계명인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호와는 종종 우리에게 남편의 자격으로 말씀하신다. 참되고 신실한 남편의 모든 직무를 수행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사랑과 정숙함을 요구하신다. 즉 우리가 사단에게 우리의 영혼을 팔아 넘기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남편이 순결하고 정숙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아내가 연적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볼 때 더 심하게 마음이 상한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약혼하게 하신 여호와는 우리가 여호와의 거룩한 혼인의 순결함을 소홀히 하면서 혐오스러운 정욕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힐 때마다, 특별히 가장 주의 깊게 지켜야 할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예배가 다른 대상에게로 옮겨질 때, 언제나 가장 격렬한 질투를 느끼신다. 간부 (姦夫)의 접근을 허락함으로써 우리가 맺은 부부의 약속을 어길 뿐만 아니라, 혼인의 침상도 더럽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투는 정확하게 말하면, 오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라는 목적 성취를 위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며, 하나님의 백성 중에 신실하지 못한 자를 징벌하고 낮추신 후에그들을 회복시키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러므로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남규 목사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