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1), 전인교육 (全人敎育)
성경은 가르침과 배움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 다른 뜻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르침이 있으면 배움이 발생하고, 배움이 있어야 가르침이 일어난 것입니다. 역으로, 학생이 배우지 않았으면 가르친 일도 없는 것입니다.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가르치다”와 “배우다”는 이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초점에 따라 의미가 다른 두 문장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이 문장은 모세가 “가르치다”에 집중합니다. 히브리어 동사 “멜라메드”입니다. 두 번째 문장인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에서, 초점은 “배우다”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울레마데템”입니다. 두 단어에서 변형을 일으키는 접두어와 접미어를 제거하면 남는 부분은 모두 “라마드”입니다. 한 단어에 가르치다와 배우다는 두 뜻이 들어 있습니다.
주로 “가르치다”고 번역되는 고전 희랍어 “디다스코”도 두 의미를 동시에 갖습니다. 어근이 가르치다와 배우다는 뜻을 가진 “다스”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디다스코는 정보와 지식을 전해 주고 그것들을 습득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두 측면을 환기시킵니다. 우선 가르침을 받고 있는 학생의 이해 능력에 적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르치는 교사의 내용입니다. 특히 실용 예술 및 공예를 가르치는 경우는 교사의 모범은 학생의 지식과 능력 형성에 교량 역할을 수행합니다. 디다스코에서 중요한 요소는 학생이 교사의 모범을 모방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학생의 재능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희랍어 성경인 70인 역에는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디다스코가 사용된 예를 보여줍니다. 이 낱말은 무기 사용을 위한 가르침에 사용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과 모든 원수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주께서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이는 주께서 나로 전쟁하게 하려고 가르쳐 준비하게 하셨나이다.” 음악을 가르칠 때도 이 낱말이 사용됩니다. “이제 이 노래를 적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어라. 이 노래를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며 내가 내릴 무서운 일들의 증거로 삼게 하라. 그리하여 모세는 그날에 노래를 적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업하는 비결을 전수할 때도 이 낱말이 사용됩니다. “누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거나, 그의 사업을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정의로운 삶을 가르칠 때도 디아스코를 사용합니다. “그는 어떤 학교에 다니며 정의를 배웠겠는가? 당신은 어떤 신이 그에게 그가 아는 것을 가르쳐 주었을까? 그에게 사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여 주었을까?”
디다스코스가 보통의 삶에서도 사용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배우게하는 용도였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세상 나라를 교훈하시는 분 그리고 사람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욥은 “인간이 하나님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모세오경에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며,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고, 가르침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나를 가르치시고 주의 뜻을 알게 해 주소서. 주의 선하신 성령으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면 자신은 행하겠다고 기도합니다.
유대인의 희랍어 성경에서 디다스코는 인간 삶의 특정 부분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양식을 통째로 가르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가르침의 용도가 지적인 것뿐만 아니라 의지적이며 행동을 유발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낱말과 관련된 전체적인 그림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제시하여 그들이 그 뜻에 복종하여 그에 따른 모습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디아스코는 창조시의 인간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가르침은 예수님 생애 동안 핵심 사역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라고 예수님 사역의 시작을 알립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출발을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 쯤 되시니라”고, 가르침이 예수님의 주 업무임을 강조합니다. 일찍이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자신의 글에 예수님의 칭호를 “선생”이라고 12 회나 언급한 마가의 의도는 가르치는 주체가 하나님인 구약성경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막 12: 14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라고 의도를 드러냅니다.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도 예수님을 “선생”이라 표현하여독자들이 그 가르침에 순종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의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심을 알립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초기 교회 디다스케의 일관성 있는 내용은 “예수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초기 교회를 이끌었던 사도 바울의 사역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라고 설명합니다. 초대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그토록 강조했던 이유는 한 개인을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되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 개인의 모든 자질을 발굴하여 육성하는 전인 교육이었습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