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 “신앙의 성숙자”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정은 가부장적이었습니다. 남자가 최상위고, 그 다음은 여성, 그리고 맨 나중은 어린이였습니다. 사회의 주체적 구성원은 성인들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가치와 필요는 도외시되었습니다. 부차적인 어린이의 존재에 대하여 사회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데려 왔을 때, 제자들이 부모들과 아이들을 꾸짖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행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심지어 화를 내시며, 제자들을 향하여,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갖는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예수님은 아이들을 한 팔에 안고 그들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사회 구성원 중에 최하위일 뿐만 아니라 존재 가치가 없는 아이들을 환대하시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사회 일반 규범을 벗어난 놀랍고도 강력한 행동과 비유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범으로 삼으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어린이에 관한 예수님의 사상은 당시 사회가 주장했던 것과 현저하게 차이가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정확하게 왜 어린 아이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신약 성경에 사용되는 어린이를 묘사하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4개가 있습니다. 첫번째 단어는 “브레포스”로 생물학적인 어린 아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가가 인사할 때, 아기가 복중에서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브레포스는 갓난 아기나동물의 새끼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두번째 단어는 “파이스”로 일곱 살부터 14살까에 있는 아이를 부르는 단어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납니다. 예수은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이 단어는 주인과 하인 사이의 부계 관계를 나타내며, 하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우받습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칠십인역)에서 “파이스” 주인의 수하에 있는 노예를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세번째 단어는 파이디온으로 새로 태어난 아기를 표현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로부터 시작하여 7살까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던 별은 아기 예수가 있는 곳에 머뭅니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합니다. 이곳에 아기로 번역된 단어들은 파이디온입니다. 이 낱말은 성장 중에 있는 아이를 묘사하며,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표현하며, 제자들을 부를 때도 사용됩니다.
어린이를 의미하는 마지막 단어는 “테크논”으로 “아기를 낳다”는 “티크토”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아기의 기원을 뜻하는 이 단어는 육신의 조상이나 영적인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녀됨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아이로 번역되었지만 아들을 뜻합니다. 부모 사망 시에 재산을 상속하는 자녀를 묘사할 때 이 낱말을 사용합니다.
성경은 어린이에 관한 언급이나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어린이는 언제나 제자도의 은유,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공유하는 신앙인들의 생활 방식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로 비유되는 신앙의 삶은 무엇일까요?
첫째, 어린이는 겸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 사실을 잘 설명합니다. 왕으로 오셨지만 연약한 여성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유대 땅의 가장 작은 마을에서 아기로 오십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가르침도 겸손으로 이뤄졌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어린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을 어린이로 표현합니다.
둘째, 어린이는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 나실 것을 예언하시고, 곧이어 어린이에 관한 교훈을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어린이가 “받들다”는 단어를 설명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덧붙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본질은 예수님을 위해서 작은 자가 되는 것이며, 죽음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셋째, 어린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기하게도 누가복음에는 어린이는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관련되어 언급됩니다. 마리아는 자기 복중에 아기 예수가 뛰논다는 소리를 듣고, “주께서 주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라고 찬양합니다. 나이 많아서까지 자식이 없던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한 후에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사회에서 천시당하던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태어나신 소식이 먼저 전해지고, 죄인 취급 받던 세리와 창기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예수님은 귀신들려 추한 행동을 하는 아이를 치료하십니다.
넷째, 어린이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반복 어급합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예수를 믿는 자가 하나님 앞에 어린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그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세계에서 큰 사람이 누군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명을 비유로 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