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생명 (1), 두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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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1), 두 종류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동물원을 의미하는 “zoo”는 매우 친숙한 말입니다. 이 낱말에서 여러 단어들이 파생됩니다. 동물의 활동을 연구하는 “zoology,” 동물에게 육체적 애정을 갖는 “zoophilia,” 동물을 신격화 해서 섬기는 “zootheism”도 있습니다. 드래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파괴적인 용신이고, 황소는 이집트 신이며, 북유럽 신화에는 펜리르라는 거대한 늑대 신이 등장합니다. 코비드 이후 모임을 위해 일상화 된 zoom은 동물의 윙윙거리는 소리에서 유래되어 “빠르게 움직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심지어 여성들의 이름 중에 동일한 어원을 가진 “조에 Zoe”가 있는데, 매우 활동적이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생명”을 의미하는 고전 희랍어 “조에”를 만나게 됩니다. 동사형은 “자오”로 “여러 해 동안 오래 살다” 혹은 “생명을 지속하다”는 뜻입니다. 명사형인 조에는 인간이나 동물 그리고 식물을 포함한 유기체의 물리적 움직이는 확력을 “조에,” 즉 생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생명은 사물이 아니라 활력, 즉 모든 생명체를 특징짓는 본성이나 방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복수형으로 사용될 수 없는 생명은 살아있는 존재가 일어나 움직이며 고유한 활동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사회를 다스리기 위해 실행에 옮겨지는 법도 “살아 있는 법”으로 생명이며,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행동하게 하는 언어도 “생명이 있는 말”입니다. 배우는 학생의 정신 속에 지성의 힘을 더해 주는 사상 교육이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설파되는 언어를 “살아 숨 쉬는 말”인 생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생명이 있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뜻했습니다. 사람이 지성과 지각을 통해 움직이거자 멈추는 행동, 식물 속의 영양분 이동으로 나무가 성장하는 하는 것들은 생명체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활동이었습니다. 동물을 활동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각 유형인 촉각의 근원도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은 운동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기계를 이용한 운동과 구별되는 자체 활동입니다.  이러한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인들의 사상 속에 생명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유사하게 소유한 자연현상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생명을 뜻하는 희랍어 “조에”는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을 지칭하는 데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창조자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그에게 생기불어 넣자, 아담이 생명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 living being”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자연적인 생명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이 생명은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과 대조가 되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이 자연적인 생명은 도태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원리를 “여러분의 생명은 안개와 같아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묘사합니다. 

   자연적인 생명은 시간적으로 확장이 제한됩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일반 법상식으로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법은 분명히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영향을 끼칩니다. 죽은 시신에게는 어떤 법이라도 준수하도록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범한 죄에 대하여도 배상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은 영원성이 없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 개념으로 그 끝입니다.    

   자연적인 생명은 살아 있는 존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실제적입니다. 이 생명은 “살다”는 의미로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죽은 딸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에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어린 소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자연의 생명은 동물이나 나무가 죽게 되면 소멸되는 생명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 기능을 상실하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 생명에 관해서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 가나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고 묘사합니다. 욥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라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통의 특징을 밝힙니다.  

   이 시점에서 인간의 생명은 자연적인 삶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양 섭취에 의해 유지 되지만, 그것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생명은 영양에 의존하는 인간의 일부인  육체을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은 더 근본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생명 보존의 원리를 말씀합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소유자이시며 공급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생명에 관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소멸되지 않고 영원성이 있는 이 생명은 자연인 모두가 소유하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람만 가지는 생명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이 영생은 그 누구도 뺏앗을 수 없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부자를 비유하여 믿음으로 얻게 되는 생명의 절대성을 설명합니다. 밭에서 수확을 많이 얻은 부자가 속으로 생각합니다.“내가 곡식을 저장해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아, 이렇게 해야 겠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세워 거기에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저장하겠다.” 그는 또 자기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인생의 치명적인 문제를 말씀합니다. 이 생명은 재산과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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