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수, “존재의 이동”
고대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파피루스에 감옥에 들어간 데메트리오스가 클레온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데메트리오스는 자신이 투옥된 원인은 특별한 범죄 행위가 아닌 노동자들과의 갈등이었기 때문에 석방을 간청합니다. 이 파피루스에는 투옥된 죄수들의 탄원서가 자주 등장합니다. 평범한 삶에서 감옥 생활로 옮겼다는 말은 희랍어 “티데미”입니다. 호메르는 이 낱말을 딸이 성장해서 결혼하여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실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티데미는 불행했던 사람이 행복한 삶을 되찾았을 때도 사용됩니다. 아테네에서는 재판이나 민회 표결을 위해 항아리 (투표함)에 돌이나 표를 던졌던 행동을 티데미라 했습니다.
성경에 “안수”로 번역되는 희랍어 “에피티데미”는 “어떤 장소에서 새로운 장소로 가져오다,” “다른 곳에 배치하다,” “효과를 유발시키다,” 혹은 “새것을 제도화하다”와 같은 티데미에서 파생된 낱말입니다. 에피티데미의 기본 뜻은 “물건을 놓다,” “손을 얹다,” 또는 “더하다”입니다. 제단 위에 희생 제물을 올려놓는 행위, 왕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는 일, 상처에 치료 수단을 적용하는 것, 누군가에게 타격을 가하거나 책임을 부과하는 행위까지 모두 이 동사로 표현되었습니다. 즉 손을 얹는다는 것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어떤 대상 위에 영향력과 권한과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였습니다. 명사형 “에피데시스”는 조각상을 세우는 일, 덮개를 씌우는 행위, 나아가 폭행이나 공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안수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가져다 얹는” 적극적 행위입니다.
희랍어 구약성경에서 안수 개념은 더욱 풍성하게 확장됩니다. 사회의 각분야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공물을 바치는 일, 병든 자를 눕히거나 상처에 치료를 더하는 행위, 누군가에게 무거운 일을 맡기거나, 음모를 꾸며 행동하는 것, 새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줄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성전 봉사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때에 에피티데미가 사용됩니다. 제단에 희생 제물을 올려놓는 행위, 제물의 뿔에 피를 바르는 일, 성전 봉사를 위해 복장을 갖추는 행위들, 등이 모두 이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안수는 일상의 노동, 종교적 예식, 사회적 책임 부여를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이었습니다.
안수 예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손을 얹다”는 표현입니다. 제물을 드릴 때 제물 위에 손을 얹는 행위는 그 제물이 자신을 대신해 하나님 앞에 바쳐짐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너는 그 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할지며,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지니, 이는 나 주를 기쁘게 하는 살라 드리는 제물이니라.” 레위인과 국가 지도자를 임명할 때도 손을 얹음으로써 하나님의 직무와 권한이 그들에게 위임되었슴을 선언했습니다. 이때 안수는 축복과 성령의 은사, 사명의 계승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이는 모세에게 임했던 지도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이 여호수아에게 공식적으로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레위인의 임직식 역시 이와 같습니다.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처럼, 안수는 하나님의 복이 가시적인 접촉을 통해 전달되는 수단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예외적인 저주의 안수입니다. 신성모독자를 처형하기 전 증인들이 그 머리에 안수하는 행위는 죄의 책임과 심판의 확증을 의미합니다. 병 고침을 위한 안수는 구약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데,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기대했던 방식처럼 당시 민간에서는 마법적 요소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마법적 요소를 배제하고, 안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수단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안수는 더욱 분명한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여전히 “손을 얹다,” “붙이다,” 혹은 “더하다”라는 기본적 의미와 함께 대부분의 경우 기도와 결합된 종교적 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고치셨고, 아이들을 만지심으로써 축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 자녀들을 그분께 데려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어린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때 안수는 예수 자신의 권능을 전달하는 통로라기보다, 하나님의 자비와 회복을 드러내는 표시였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안수는 예수의 손길을 통해 임하는 치유와 회복이었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환자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열리라”고 명령합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회복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안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안수하자 그의 눈이 밝히 보이게 됩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는 안수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치유와 성령의 은사를 위한 안수이고, 다른 하나는 직분과 사명을 위한 안수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에서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것을 본 시몬이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성령을 부여하는 안수는 세례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안수를 통해 집사와 선교사를 세우고, 공동체의 사명을 공식적으로 위임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두 사람에게 안수합니다.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수를 매우 신중하게 사용하는 이유는 그 행위가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안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주술적 행위가 아닙니다. “존재의 이동”과 “직무의 책임”이 담겨 있는 준엄하고 신성한 예식입니다. 안수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공동체의 책임 속에서 이루어는 성례전 (聖禮典)입니다. 손을 얹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시는 일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선포하는 표시입니다. 안수를 받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통치 질서 속에 배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수 받은 자에게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라고 조언합니다. 안수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을 대행하는 자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권위로 안수받는 자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자입니다. 안수는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놓으시고,”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질서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작업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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