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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인간, “하나님의 형상 God’s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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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ohn-Mark Smith on Pexels.com

인간, “하나님의 형상 God’s Image”

 “안드로포스”로 불렸던 “인간”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이 평생 한 일은 사람들이 육체와 재산보다 먼저 영혼을 돌보도록 권면하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참된 가치는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영혼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호메로스 시대에도 인간은 짐승과 구별되고, 신과도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있지만 자연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대 사상은 인간을 단순히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정신, 영혼, 그리고  육체가 결합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인간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우주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이며, 창조주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LXX)은 “흙” 혹은 “먼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담”을 안드로포스”로 옮겼습니다. 이 선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인간은 특정한 민족이나 계층, 성별에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보편적 존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이상적 인간과 다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위대함만 말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도 함께 보여줍니다. 시편 저자는 인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인간의 본질은 지혜롭고 위대하지만 동시에 유한한 실체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도 시간 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단순한 흙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엄한 생명체로 묘사합니다. 

   인간은 자연계의 다른 생명체들과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 속에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반문하시며, 고통받는 인간을 치유하고 섬기는 일이 율법주의적 틀에 갇혀 동물을 돌보는 행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함을 강조하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육체의 부활을 변증하는 대목에서 육체의 종류가 다름을 논하며 사람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 새와 물고기의 육체를 엄격히 분별함으로써 인간의 독자적 도덕성을 변증합니다. 성경적 문맥에서의 인간은 철저히 생물학적 짐승이나 초월적 신과 구별되는 독특한 지위를 갖습니다. 

   인간과 동물계의 구별만큼이나, 성경은 인간과 천사 사이의 경계선 또한 명확히 합니다. 두 존재는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 형식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들이 당하는 당대의 고난을 묘사하면서 자신들이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고백하며 영적 존재인 천사와 가시적 존재인 인간을 대조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의 절대성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천사적 신비보다 인간의 역사 속에 구현되어야 할 사랑의 실천이 우위에 있음을 피력합니다. 

   성경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세웁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는 신들이 인간처럼 질투하고 분노하며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절대자이시며 초월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며 하나님은 심판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과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보여주는 배경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을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옛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새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며 자신의 욕망과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노력한다고 완전히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새롭게 창조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사람은 단순히 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 근본이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의 죄와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갑니다. 

   이 신비로운 “새 사람”의 완전한 모범이자 실체는 다름 아닌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구약의 예언적 성취인 “인자,” 즉 인간의 아들이라 칭하시며 죄인들의 고통과 비참함에 자신을 온전히 동일시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그가 성취한 인성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바울과 사도적 교부들 역시 예수를 형이상학적 신성으로만 가두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거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며 구체적인 역사적 ‘사람’으로 끊임없이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섬기는 인간, 사랑하는 인간,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그 형상이 깨어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망가진 비극적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 안에는 창조의 영광과 타락의 상처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갑니다. 교육자 찰스 E. 가먼은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때에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깨어진 아담의 옛 구조를 벗어 버리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입는 것, 그것이 안트로포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우리 모두의 영원한 소명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