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혼, “사회적 재앙”
“결혼 전반에 걸쳐 한 가지 일반적인 규칙이 있다. 각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결혼보다는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결혼을 해야한다. 누구나 자신과 가장 비슷한 배우자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 인해 국가 전체가 부와 도덕적 습관 모두에서 불균형해지게 된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우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는 대부분의 국가에 닥치는 재앙이다.” 플라톤은 결혼은 도시 국가의 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녀가 쉽게 이혼하는 사회적 풍조로 인해 국가에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루푸스는 결혼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에는 무엇보다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완벽한 동반자 관계와 상호 간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그리고 모든 상황 속에서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데, 애초에 이러한 보살핌과 자녀를 갖겠다는 갈망을 안고 결혼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를 향한 사랑이 완벽하고 두 사람이 그것을 온전히 공유하며, 각자가 헌신에 있어 상대방을 능가하려고 노력할 때, 그러한 결혼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워할 만한 이상적인 결합이 된다.” 그는 남편과 아내는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결혼 질서를 강조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했던 쉬운 이혼 풍조와 개인주의적 이기심을 비판하고, 결혼을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나 출산의 도구를 넘어선 “영혼과 삶의 완벽한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 영혼의 절대적 평정을 가르쳤던 세네카는 1세기 로마 제국 초기의 엄격한 도덕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사치와 쾌락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에 여성들을 향하여 쓴 소리를 외칩니다. “이혼이 부끄러운 일이었던 시절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가? 이제는 고귀한 가문의 몇몇 여인들이 집정관의 이름이 아니라 남편의 수로 세월을 계산하지 않는가? 그들은 이혼하기 위해 집을 나서고, 다시 결혼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결혼이 유효했던 동안에는 이혼이 두려운 일이었으나, 이제는 이혼 자체가 결혼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현대 사회에도 이혼은 감기만큼이나 흔한 질병이 되었습니다. 한때 할리우드 은막 스타들의 유행병처럼 여겨졌던 이혼은이제 두세 쌍 중 한 쌍이 겪는 보편적 비극이 되었고, 국가 지도자들과 종교계 고위 인사들의 삶마저 뒤흔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 사이에서 조차 이혼율이 급증하는 현실은, 기독교 가정을 무너뜨리려는 초자연적이고 조직적인 영적 공격이 실재한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손쉬운 이혼 제도를 구가하는 현대인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혼이 단순한 “계약 해지”가 아닌, 결혼의 “부자연스러운 죽음 unnatural death”이자 영혼을 파괴하는 폭력이라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혼을 뜻하는 단어는 “아폴루오”와 “아포스타시온”이 대표적으로 쓰입니다. 첫 번째 단어인 는 1세기 군사 대국이었던 로마 제국에서 군인을 복무로부터 “제대”시키거나,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하고, 파산 지경에 이른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줄 때 쓰이던 법률 및 군사 용어였습니다. 얽매인 삶에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는 긍정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결한 해방의 언어가 가정이라는 언약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배우자를 무자비하게 내쫓고 관계의 안전망을 뜯어내는 무기로 전락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단어인 “아포스타시온”은 단순히 헤어지는 행위를 넘어, 그것을 공식화하는 “이혼 증서 (판결문)”를 뜻합니다. 희랍어 구약 성경(LXX)은 남편이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내쫓을 때 손에 쥐여 주어야 했던 합법적 서류를 이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기독교 맥락에서 이 절차는 언뜻 남편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로 보이지만, 고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고대 세계의 이혼 원칙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남편이 아내에게서 도덕적 혹은 신체적 결함을 발견했을 때만 이혼이 허용되었다. 둘째, 남편은 반드시 아내에게 법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보호해 주는 이혼 증서를 주어야 했다. 셋째, 아내와 이혼한 남자는 다시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규정들은 한 남자가 더 젊고, 더 아름답고, 더 부유한 여성과 정욕에 이끌려 차례로 결혼하는 “연속적 일부다처제”를 원천 차단하기 위한 예방책이었습니다. 아포스타시온은 완악한 남성들의 정욕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의 인권과 재혼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율법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이 제도를 왜곡하여 온갖 사소한 이유로 아내를 길거리에 내팽개치는 도구로 오용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혼을 가리켜 언약을 맺은 배필을 향한 “두 번의 배신”이라 명명하며, “나는 이혼을 미워하노라”고 엄히 말씀합니다. 율법의 허용은 인간의 악함에 대한 차악의 통제책이었을 뿐, 결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역시 이혼에 대해 철저하리만큼 엄격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조차 정혼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율법적 절차에 따라 조용히 이혼 (아폴루오)하려 했습니다. 물론 이는 천사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중단되었지만, 이혼이 당대 의인들에게조차 중대한 법적 고려사항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당대 유대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해괴한 이유로 이혼을 정당화하던 왜곡된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주님은 부정한 행위 (간음)라는 명백한 예외를 제외하고, 자유롭고 쉽게 이혼하고 재혼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간음”과 다름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여성이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하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비록 유대 사회에서 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나, 그리스와 로마의 이방 세계에서는 오늘날처럼 쌍방에 의한 이혼이 흔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갈라선 부부의 재혼 금지를 강력히 권고한 것도 바로 이러한 세속적 홍수 속에서 교회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인류가 직면한 이혼 문제의 뿌리는 제도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한 마음”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활한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유일한 이유가 바로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다고 꼬집으셨습니다. 현대 법정이 사용하는 “성격 차이” 혹은 “유지할 수 없는 관계”라는 세련된 법률 용어 이면에는, 서로에게 무릎 꿇지 않으려는 이기심과 완악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간음이라는 극단적인 언약 파괴 행위를 제외한다면, 기독교적 가치관 안에서 이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영적 실패입니다.
이혼은 결코 개인의 사생활 영역에 머무는 사소한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한 영혼과 그 가문의 미래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사회적 재앙입니다. 갈등을 피해 도망치려는 완악한 마음을 꺾고, 십자가의 용서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것만이 이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막아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남규 목사


![[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빛 Light,” 크리스마스 (1) merry christmas sign](https://christiantimes.ca/wp-content/uploads/pexels-photo-1656564-1-324x160.jpeg)
![[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에너지 (2), 변형 (Transformation)시키는 힘 pink pencil on open bible page and pink](https://christiantimes.ca/wp-content/uploads/pexels-photo-272337-1-324x160.jp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