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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 그런뜻이었구나] 우상, “마음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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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ohn-Mark Smith on Pexels.com

우상, “마음의 주인”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제논의 거주지였던 고대 아테네는 인류 문명이 이룩한 최고 수준의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철학과 사상의 황금기였던 AD 50년경 바울 사도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는 “그 도시가 온통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첨단 과학과 지식이 문명의 외연을 넓혀갈수록, 인간의 내면은 도리어 더 깊은 공허와 결핍에 직면합니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리버럴하고 이성적이라 믿지만, 실상은 그 어느 때보다 무언가를 열렬히 숭배하며 살아갑니다. 재력, 사회적 지위, 명예, 심지어 자기 자신이나 특정 사상에 이르기까지 숭배의 대상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경고하는 “우상 숭배”는 비단 고대 신전의 돌상 앞에 절하는 종교적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깊은 상자 속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정교한 실재의 대체 작업입니다. 

   “우상”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에이돌론”은 본래 종교적 색채가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단어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문헌이나 비극 작가들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환영 (幻影, illusion)” 또는 “그림자”로 “물에 비친 반사체”나 “실체가 없는 복제품”을 의미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우상이라 부르지 않았기에, 당시 고대 그리스 사회에는 “우상 숭배”라는 개념이나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가 결정적인 영적 전환을 맞이한 계기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 (LXX)”의 등장입니다. 70인역 번역자들은 허무하고 실체가 없는 이교의 신들, 즉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형상들을 가리키기 위해 “에이돌론”을 선택했습니다. 구약의 저자들에게 이교의 신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대체 신”이 아니라, 아무런 능력도 영혼도 없는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원어적 맥락을 바탕으로 우상 숭배를 단호하게 비난합니다. 신약에서 “에이돌론”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손으로 만든 물리적 형상입니다. 이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인 “너는 네 형상이나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에 근거합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설교를 통해 광야 시절 조상들이 아론을 이끌고 금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들었던 역사적 죄악을 지적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과거 이교도 시절 섬기던 “말 못하는 우상”을 언급하며, 성령 안에서의 참된 삶과 대조합니다. 요한계시록 또한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둘째는 형태의 유무를 떠나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모든 “거짓 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아테네인들이 속이는 신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등 여러 서신을 통해, 육신의 정욕과 탐심과 영적 혼합주의가 곧 우상 숭배임을 지적했습니다. 특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명시하며, 마음의 욕망이 어떻게 우상으로 변질되는지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첫 번째 편지를 마무리지으며 던진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는 당부는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모든 거짓된 것들에 대한 최후의 경고였습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에 끌리기 쉽고, 그것이 즐겁게 느껴지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빠져든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에,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현대의 복음주의 작가 아서 월리스는 이러한 종교개혁적 통찰을 이어받아 우상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의합니다. “우상이란 마음속에서 주님께 속한 최고의 자리를 찬탈한 사람이나 사물이다.” 이 사실에 관해서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적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적당하지 아니하며”라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관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보다 높은 우선순위에 둘 때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종교적 형상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 자원을 가장 우선적으로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우상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평생을 성경 연구와 그것을 가르치는 삶을 업으로 살았던 제임스 I. 패커는 우상 숭배를 하나님을 사람이나 더 낮은 형태의 피조물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상 숭배는 특정 종교 의식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 역시 우상 숭배의 위험에 깊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19세기의 무신론자 로버트 잉거솔은 “인간은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어 숭배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무신론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투사이론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자들을 이렇게 경고합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신상을 만들고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드는 자 누구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따라 우상을 만들어 신전에 놓는도다. 나무로 신이랍시고 만들어 예배를 드리는 구나. 신상이랍시고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하는구나.”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성과 이데올로기, 또는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만들어 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은 하나님만을 숭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의존하는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하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물질이든 눈에 식별되든 안되든, 우리는 그것들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우상은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무의미해집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주인입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권력에 의해 지배됩니다. 인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기쁘게 해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지배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에게 지배받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온통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상은 우리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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