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4), 영혼의 문제
사람을 아는 데는 몇 가지 등급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나 많이 혹은 적게 열어 보이는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오픈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을 잘 알 수도 있고, 잘 알지 못할 수도 있고, 그저 악수나 할 정도로 알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친밀하고 깊게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자신의 필요를 부모에게 언제든지 거리낌 없이 요구하는 이유는 자식은 부모를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육 과정에서 보모들은 자식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줬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들 보다는 상대방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아는 것은 우리들이 상대방을 알려고 노력한 결과라기 보다는 (물론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상대를 알려고 시도하는 몇 경우도 있슴 ) 그들이 우리에게 자신들을 알도록 허용해준 결과입니다. 이제 앎의 지식은 곧 신뢰와 믿음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빌립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그들에게 다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에 관하여 샅샅이 오픈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피스토스”의 근본적 세계는 신뢰와 확고한 신념과 그리고 의지입니다. 삶으로 비유하면 믿음이란 여정에 관한 것이 아닌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가 동반하는 의로운 삶 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요한 복음에는 피스토스의 본질적 세계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를 믿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믿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피스토스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넣어 보라고 말씀하신 후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글을 기록한 목적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밝힙니다.
둘째, 피스토스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에 관하여 선포된 내용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사실을 거듭 반복 언급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거늘, 하나님의 증언은 더욱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피스토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하실 때에 유대인들이 무슨 말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절하며 책잡으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도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말씀합니다.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미래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넷째, 피스토스는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이 피스토스에 관해 진술한 동기는 바울의 경우처럼 구원의 길에 대한 내용이 아닌, 구원 자체에 대한 올바른 관점입니다. 이에 대한 그의 특징적인 용어는 바울의 경우처럼 정의가 아닌 언제난 영혼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해서 증언하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믿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 즉 영생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섯째, 피스토스는 하나님의 소속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구원과 영생은 세상의 제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것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신앙인의 소속을 밝힙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규범과 가치에서 돌아서서 참되고 새로운 최상의 가치의 세계로 귀화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피스토스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신자들의 삶에는 사랑이 솟아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