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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뱃속에서 우러나는 열정, “긍휼”

뱃속에서 우러나는 열정, “긍휼”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테살리아의 왕 아드메토스에게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자, 왕은 이렇게 답합니다. “친구인 아드메토스에게는 솔직하게 말해야 했네. 치욕의 근원을 뱃속에 소리 없이 쌓아 두어서는 안되네. 나도 당신의 불행 속에 함께 함으로 내가 당신의 친구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당신이 부인의 죽음으로 슬픔 가운데 그녀를 장사했다는 말을 내게 하지 않아서, 나는 집에서 잔치를 하며 보냈네.” 아드메토스 왕이 사용한 뱃속이라는 낱말은 희랍어 “스프랑크나”입니다. 이 낱말은 “긍휼”로 번역됩니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코에프로이』에 스프랑크나가 다음과 같이 사용됩니다. 합창단이 엘렉트라 공주의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 슬픈 비탄을 들을 때마다 나의 가슴이 다시 쿵쾅거린다. 나는 즉시 희망이 없고 지금 듣는 이 말들로 인해 나의 내장이 어두워진다.” 내장으로 번역되는 낱말이 긍휼을 뜻하는 스프랑크나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스프랑크나는 심장, 폐, 간과 같은 뱃속의 장기를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인들에게 뱃속을 뜻하는 스프랑크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감정의 자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이곳은 모든 감정, 즉 분노, 불안, 두려움, 심지어 사랑의 저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긍휼이란 이 낱말의 어원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평범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닙니다. 대신 한 개인의 존재를 움직이는 내면 깊은 곳의 열정입니다. 이 낱말은 인간의 동정심에 의해서 움직이는 힘을 나타내는 강렬한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공관 복음서 외에는 결코 사용되지 않습니다. 복음서 안에서도 비유에서 사용된 세 번을 제외하고는 항상 예수님 자신에 대해 사용됩니다. 비유에서 첫번째는 빚을 갚지 못하는 종을 불쌍히 여기는 주인에 대해 사용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두번째는 집에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리고 세번째는 사마리아인이 여리고 도상에서 부상당한 여행자를 도우러 갔던 연민을 표현할 때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실, 이 세 경우도 예수님의 깊은 속이 무엇인지를 비유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경우에 이 낱말은 예수님 자신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뱃속 (내장)이 움직였다고 표현할 때는 무엇인가 아주 깊고 신비스러운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피상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이나 동정이 아닌 예수님의 존재의 가장 깊고 여린 부분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긍휼을 느끼셨을 때는 그분의 존재 근원이 열리고, 모든 사랑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며, 또한 거대하고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힘없는 자들, 병든 자들,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긍휼 즉 스프랑크나의 신비를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며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시고,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부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과 한가지로 느끼셨습니다. 무리들이 자신을 따라 광야로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굶주림과 궁핍함을 보시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이 단어는 나병환자에 대한 예수님의 동정심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눈먼 두 맹인에 대한 예수님의 동정심, 외아들이 사망한 홀로된 한 여인을 보며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리고 간질병 아들을 둔 아버지의 호소를 듣고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성으로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동일하게 느끼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쓰여지는 이 단어의 용례들을 통해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사람들이 직면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영적 상실감에 깊게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에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보면서 미안해했습니다. 인간의 상실감 앞에서 –그 상실감이 자신들의 잘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정죄할 범죄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길 잃은 방랑자로 보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배고픔과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굶주리고 피곤한 무리와 눈먼 사람이나 나병 환자의 상태를 보시면서 연민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성가신 존재로 여기지 않고 항상 자신이 도와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희랍 의학의 창시자인 히포크라테스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분은 유능한 의사와 같아서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해 고통의 요인을 검진하시고, 종기를 치료하시고, 또한 남의 괴로움에서 스스로 괴로움을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무관심하게 대하지 않으셨으며, 싫어 하시거나 혐오감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들의 슬픔에 의해 움직이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 장례행렬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녀의 불쌍한 처지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분은 그 상황에 무관심하시지도 그리고 모른 체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과부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인간의 상황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도록 자신의 동정심을 강요했습니다. 

   둘째, 스프랑크나의 주목할 만한 점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영향력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인간의 상황속에 개입하셔서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이 움직였다는 표시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또한 철저하게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발생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종 병든 사람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주는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굶주린 무리들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섯개의 작은 빵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던 아들이 죽어 슬퍼하던 여인을 향해 마음이 깊게 움직이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며 “소년아, 내가 네게 말하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 속에 조건 없이 동참하셔서 문제를 치유하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주님의 긍휼을 공유하게 되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온 사도들과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과 함께 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라고 촉구합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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