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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바라봄,” 속세에 무관심

“바라봄,” 속세에 무관심

애굽 왕실에서 성장했던 모세가 자신의 신분을 노예로 바꿨던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 즉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광야 생활이 이집트의 호화스러운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살이하던 자기 민족의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애굽의 왕자로 누렸던 안락함과 쾌락을 포기했습니다.모세가 애굽의 화려한 삶을 포기할 수 있었던 근거는 상급에 대한 대가를 존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이 땅에서 얻는 보화와 비교할 수 없이 더 가치 있다는 것에 눈을 떴던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에서 “바라보다”는 희랍어 “아포블레포”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 성경 New Jerusalem Bible은 이 낱말을 “그의 눈이 보상에 고정되었다”고 번역합니다.

   “바라보다,” 즉 아포블레포의 근본 의미는 “한 가지에 시선을 집중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에서 시선을 멀리하다”를 의미합니다. 한 가지에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을 뜻합니다.신약 성경에 이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또다른 낱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2에 언급된 “아포라오”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아포라오)”고 제안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를 영어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자”라고 번역합니다. 희랍어 학자 모패트는 이 낱말을 “우리의 눈은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예수님께 고정되어야 한다”라고 번역합니다.이 낱말의 개념은 인간의 마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창조물이 아닌 창조자 하나님께 고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희랍어 사전인 『리들과 스콧  렉시콘』에는 아포블레포를 “다른 모든 사물에서 한번에 눈을 돌리다” 혹은 “확고 부동하게 한 곳만 응시하다”라고 설명합니다. “아테네인” 이라 불린 필로스트라투스는 당시 유명한 철학자  아폴로니우스가 승선한 배가 이집트에 상륙했을 때, 그가 배에서 걸어 나오자 사람들의 모든 눈은 마치 신을 쳐다보듯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포블레포)”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사상가 크세노폰은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한 사람과 대화하면서, 그는 “당신의 조국이 당신을 보고 있소 (아포블레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너무나 허영심에 사로 잡힌 한 여성과 대화하면서 “당신은 자신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아포블레포)”고 조언했습니다. 플라톤은 사랑하는 연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완전하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남자의 목표다. 그래서 그 여인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의존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아포라오도 집중해서 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로마의 고전 작가 루키아노스 는 논쟁 하는 상대방이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보는 것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을 가르쳤던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목표를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의 선생님이고, 여러분은 우리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 내 교육의 목적은 너희로 완전한 일을 수행하게 하고,  장애물과 강한 충동과 속박에서 안전하고, 자유롭고, 번성하고, 그리고 행복 하며, 크든 작든 범사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아포라오)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위대한 영웅이자 자신의 은인인 헤라클레스는 무엇을 하든지 제우스 신을 바라봤다 (아포라오)고 설명했습니다.   

    “빤히 쳐다보다”는 의미를 가진 또 다른 희랍어는 “아테니조”입니다.  의사 누가의 글에는 이 낱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다 주목하여 보더라 (아테니조)”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 제사장의 뜰에 있던 베드로를 향하여 한 여종이 “주목하여 (아테니조)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외칩니다.  이 낱말은 예수님의 승천하시던 모습을 제자들이 바라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바라보는 데 사용되었고, 기적적으로 그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고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놀란 시선에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다 붙잡혀 공회 앞에 이끌려온 스데반을 그들이 응시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폭도들이 스데반을 돌려 칠 때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에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천사가 고넬료의 방에 들어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가 놀란 눈으로 주목하여 천사를 바라볼 때, 그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베드로가 주목하여 볼 때 사용됩니다. 이 낱말은 자신의 사역을 훼방하던 마술사 엘루마를 향한 바울의 날카로운 시선에 사용됩니다.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해 걷지 못하는 환자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이 일어나자,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볼 때 이 낱말이 사용됩니다. 이 낱말은 또한 산에서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을 백성들이 바라봤을 때, 그의 얼굴에서 빛나는 신성한 영광 때문에 그들이 모세의 얼굴을 주목할 수 없었다고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종합적으로 아테니조는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모습,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모습, 정밀하게 조사하여 확신을 갖고 바라보는 모습, 기대와 희망의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 순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 권세를 바라보는 모습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정보로부터 하나의 놀라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시선이 완전히 한 곳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된 사람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방이 세속적 가치로 오염되어 쉽게 전염되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께 시선이 집중된 삶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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