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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소망 ④, “그  파운데이션”

소망 ④, “그  파운데이션”

이집트의 노예 생활 이래 수 세기 동안 온갖 고난에서 유대인들이 견뎌낼 수 있었던 근성은 메시아의 도래 사상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희망만 있다”는 삶의 자세는 그들이 부딪치는 모든 역경을 뛰어넘게 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골짜기에 드러누운 마른 뼈들 속에 생기를 넣어 살아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고전 로마와 그리스 사회에서 소망은 병을 낫게 하는 치료약이었습니다. 환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현재의 상황에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병을 치료하는 좋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소망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활기를 불어넣는 윤활유였습니다. 소망 없는 삶은 존재 가치가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소망이었습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소망은 신앙의 3대 기둥의 하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믿음과 사랑과 그리고 소망 위에 세워졌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직면하는 삶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까지도 소망으로 대처했습니다. 인간 삶에 이토록 중대한 소망의 파운데이션을 무엇일까요?   

   소망을 떠 받치는 토대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헨리 나우웬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교통사건을  작은 책자 『거울 너머의 세계』에 소개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은 학자로서 철저하게 자신의 학문적 성취, 사회적 성공, 그리고 안락한 삶을 위해 달려왔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후의 삶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삶에 끼여든 이러한 모든 방해 거리들은 평범한 유형의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오히려 지금까지 나의 신체적, 정서적, 영적 평안을 지켜 온 안전 장치들이 아니라 한층 더 깊은 연결성들을 발견하게끔 하는 기회들을 제공해 주었다. 그 방해 거리들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를 전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 방해 거리들은 내게서 뭔가를 하나 빼앗아 간 대신에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었다. 교수로서의 성공 너머에는 고독과 공동체 안에서의 내적 평안이 있었고, 나의 어머니와의 유대 관계 너머에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으며, 북아메리카의 안락한 생활 너머에는 볼리비아와 페루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해맑은 미소가 있었고, 학자로서 쌓아 온 경력 너머에는 마음과 몸이 부서진 사람들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소명이 있었으며, 아주 정겨운 우정 너머에는 내 심령 전체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한 삶을 위해 갖추고들 사는 많은 ‘사회적 장치들’ 너머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와 라헬의 하나님, 그 이름을 사랑이라 칭하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두렵고 떨리기만 하던 순간에, “거울 넘어”에서 깊은 평안을 느끼게 하고 소망을 가져다 줬던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소망의 근저에는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소망의 파운데이션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소망의 파운데이션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 진리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 밝힙니다. “여러분의 믿음으로 행한 일들과, 사랑으로 행한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소망을 지켜 가는 모습을 보며, 늘 하나님께 감가하고 있습니다.”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한결같이 희생적 사랑을 행할 수 있었던 강인함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보고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언젠가는 도움을 가져다 주실 것을 소망하는 자입니다.  

   둘째, 소망의 파운데이션은 하나님입니다. 베드로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믿게 되었나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이제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소망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소망의 생산지이시며 공급처입니다.  

   셋째, 소망의 파운데이션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사람이든 불의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다시 부활하리라는 소망입니다.”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신앙을 언급할 때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경건한 여인들은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을 바라봤던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눈을 소망의 창조자인신 하나님께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노인과 바다』를 통해, 저자 헤밍웨이는 “인간은 소망의 존재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노인이 되뇌는 말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냅니다. 그가 물고기와 싸우면서 “인간은 부서질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는 말은 인간의 근본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립니다. 육체는 낡아지고 쇠할 수 있지만 영혼 속에 담겨진 정신, 의지, 힘은 인간이 직면한 모든 현실을 이기게 하며 영원히 존속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돛새치를 먹기 위해 집요하게 따라붙는 상어 떼와 처절하게 싸우면서 노인은 다짐하며 중얼거립니다. “소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소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It is silly not to hope. It is a sin.” 인간 영혼이 정상적인 기능을 위해서 소망은 절대적인 것을 말합니다. 

   인간 삶의 여정은 위험과 불행 그리고 아픔과 고통의 지점들을 필연적으로 지나가야 합니다.  『노인과 바다』속의 소년은 항해가 힘겨워서 배를 바꿔 탑니다. 그러나 인간의 숭고함은 “부서질지라도 패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부딪치는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 삶에 소망이 있고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통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소망, 내일은 내 삶에 환한 빛이 비출 것이라는 소망, 그래서 내 인생의 미래는 아름다운 날들로 전개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어야 우리의 영혼에 투혼이 일어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내 삶에 새로운 일을 행할 것이라는  소망은 직면한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소망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떨리고 망설이는 종류의 소망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사실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확신에 찬 기대입니다. 그 파운데이션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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