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관 검색어_김카리스 (구약학 박사)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조상,’ ‘믿음,’ ‘순종’등의 단어들을 연관 검색어로 끌고 다닌다.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적 조상’인 그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나 알 수 없는 땅으로 떠난 점도 그와 ‘믿음’과 ‘순종’이라는 단어가 연결되는 맥락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정점은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 말씀에 따라 제단에 올려 희생 제물을 잡듯이 바치려 했던 순종의 모습, 믿음의 모습을 보인 것일 거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도 갖게 된다.
왜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모습이 믿음의 모습일까?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늘의 뭇별과 같은 후손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은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이삭은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고, 죽었으나 살았으니 살아난 것이다. 비약이 있다. 죽지 않았는데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그리나, 아브라함의 순종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기에 우리는 이 비약에 눈을 감고 ‘순종’과 ‘믿음’의 개념에 눈을 뜰 수 있다. 그러니 비유다. 그리고, 죽은 것이나 진배 없는 이삭이 아니라 죽은 ‘예수,’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예수’로 가는 길목에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서서 이정표 역할을 해주기에 고마울 뿐이다. 그래서 ‘조상’의 칭호를 아낌없이 붙여 그를 부른다.
그가 아들 이삭을 데리고 제단으로 가는 이야기는 창세기 22장에 등장한다. 5절에서 종들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그날의 일정을 이야기 하는 아브라함의 단어에서부터 그의 믿음의 조짐이 보인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제사를 마치고 홀로, 내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돌아온다고 말한 부분도 분명 시선을 끌지만, 아들을 ‘번제’로 드리러 가면서 이 단어 보다는 ‘예배하다 (הִשְׁתַּחֲוָה )’라는 단어로 대치해 말하는 부분이 그렇다. 히브리어로는 ‘엎드리다,’ ‘경배하다’ 등으로 파악되는 단어이다. 마음이 빠진 ‘제사’가 싫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은 알았다. 마치 사무엘상 15장 22절, 예레미야 6장20절, 아모스 5장 22절, 모두 제사 보다 순종이 낫다고 적은 성경 구절을 그는 미리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제사의 본질을 아브라함은 알았기에 죽음의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제사의 본질인 그의 ‘순종’을, ‘경배’를 이미 받으셨으니까.
시편 40편 또한 제사의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읊는다. 6절 말씀이다.
זֶבַח וּמִנְחָה לֹא־חָפַצְתָּ
אָזְנַיִם כָּרִיתָ לִּי
עוֹלָה וַחֲטָאָה לֹא שָׁאָלְתָּ׃
Sacrifice and present you did not desire,
Ears you have opened [pierced] for me,
Burnt and sin-offering you did not asked.
(희생) 제사와 곡식 제사를 당신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내) 두 귀를 당신은 열었습니다. 나를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당신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특성 중 하나가 메시지의 핵심을 글의 한 가운데 배치하는 것인데 이 구절 또한 그러하다. 신문 지면 배치를 고려하여 시편의 한 절을 세 줄로 나누어 썼는데 마침 이 구조가 이 특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첫째 줄과 셋째 줄 사이, 가운데 위치한 둘째 줄의 어귀가 이 절의 핵심이다. 그 핵심 메시지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내) 두 귀를 당신은 열었습니다. 나를 위해” 라니. 여기서 열었다고 번역한 동사 כָּרִ֣יתָ 는 열다, 뚫다, 파다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개역개정은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이라고 의역했다. 어떤 학자는 고대 사회에서 노예의 신분을 드러내도록 주인이 노예의 귀를 뚫어 귀걸이를 채우는 모습으로 보기도 하고, 귀가 더 잘 들리도록 귀를 파준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귀에 대한 이 동사의 의미는 그 귀를 가진 자가 잘 들어서 ‘순종’하게끔 하기 위한 행위이다.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서 10장 5절과 6절은 이 시편 구절을 예수를 가리키는 구절로 인지하고 인용하였는데 “두 귀”를 “몸”으로 바꾸어 해석을 가미하였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요약하자면, 귀에서 순종으로, 순종에서 그 실례로, 즉, 순종한 몸, 그리스도의 몸으로 해석이 확장되었다. 탁월하게 시편 40편 6절의 말씀의 고갱이를 풀이한다. 히브리서 화자는 ‘귀’와 ‘몸’을 연관 검색어로 묶은 셈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기독교의 ‘역설적 생명’이 살았으나 죽은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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