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땅에 선 나무라도
지금 저에겐 사춘기인 아들이 있습니다. 저와 관계도 좋고 여전히 귀엽고 살갑게 구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들으면 이성과 논리의 잣대를 세워 보통의 기독교인들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수긍하기 어려워 합니다. 엄마가 구약 성경을 전공했고, 아빠가 목사라도 그 아이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 믿기를 원하면서 왜 이렇게 믿기 어렵게 성경을 써놓았을까? 그래서 세상에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 . .” “하나님이 선하시다면서 지옥은 왜 만드셨어? 지옥 갈 사람들 지옥 갈 줄 아시면서 그 사람이 왜 태어나게 하셨어? 영원히 고통 받는 지옥에 갈 줄 알면서 태어나게 한 것이 사랑일까?”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면 십자가에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거지. 부활하실 거니까. 사람들의 고통과 비교 할 수 없지 않아?” 그리고 저에게 완전히 폭탄을 투척한 듯한 질문은 다음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도 다른 예수님도 또 만드실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예수님은 창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이시지. 창조의 대상이 아니고 스스로 계신 분이야”라는 기본을 이야기하고, 다른 어떤 설명을 해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함’ 이란 전제 앞에서 그 아들에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얼마든지 다른 신이라도 만드실 수 있다는 논리의 체계를 저희 아들은 뚫고 나오지 않습니다. 자주 저를 웃음짓게 하는 장난을 걸어오는 아들인데 성경과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다 보면 저를 근심하게 하여 기도의 자리로 내몹니다.
결국 아들의 태도 문제를 제가 지적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비판만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성경을 읽는 노력도 하지 않는 건 바른 태도가 아닌 것 같아.” 그러자 이해를 바라는 진지한 목소리로 아들이 대답을 합니다. “엄마, 성경은 너무 읽기가 어려워. 그 대신 나에겐 엄마, 아빠가 있잖아. 그래서 질문하는 거야. 아직 내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아들의 이 말에 ‘그래도 말씀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었구나! 아직은 엄마, 아빠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제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마른 땅에 서 있는 나무 같지만 그래도 뿌리가 물을 찾으려고 땅 속에서 더듬어 나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편 1편이 마음에 다가 옵니다.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문(prologue)’ 같은 역할을 하는 지혜시입니다. 시편 전체를 어떤 태도로 읽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대조법을 사용하여 위에 인용한 1-3절의 의인을 뒤에 나오는 4-6절의 악인과 선명하게 구분합니다. 또, 시편 2편과 대조 시켜 2편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열방이나 왕들과 다른 의인의 삶을 명시합니다. 즉, 토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의인을 묘사합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져 생명력이 무성한 ‘나무’와 같지만 악인은 바람에 나는 죽은 껍데기 ‘겨’와 같습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어 생명을 확장해 가는데 겨는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립니다. 그 속에 뿌리도 없고 씨도 없어 생명이 그칩니다. 학자들은 시편 1편이 직접적인 권면 없이 이 대조를 통해 어떻게 살지 독자들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남겨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도록 독자의 마음을 잡으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문학적 시도인데요, 우선 1절의 첫 단어가 그렇습니다. 히브리어로 1절은 אַ֥שְֽׁרֵי־הָאִ֗ישׁ (Blessed is the man) 라고 시작을 하는데 “복있는”이라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 입니다. 그것도 복수형태이고요. 뒤에 나오는 말, “사람”과 연결해 한 뭉텅이로 쓰기 위해 단어의 일부를 축약한 형태 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이를 감탄사라고 분석 합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O how happy (the one)!” 정도로 “아, 행복한 사람!” “와, 행복하네!”라는 첫 시작 구절에 탄성을 지르는 겁니다. 누군가 옆에서 “와~, 이 사람 정말 행복해보여!”라고 말한다면 왜 행복한지 궁금해 질테니까요.
그런데 반전은 그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 행복한 사람들의 묘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편 1편은 시 답지 않게 구체적 서술을 합니다. 관계 대명사를 사용해서요. “the one who~”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있잖아 어떤 사람이냐면 . . .” 하고 설명을 합니다. 시적인 함축적 성격이나, 짧은 운율이 좀 안 맞더라도요. 그 대신 정교하게 묘사를 합니다. 다만, 그 묘사가 “돈 많은 사람이야,” “정말 건강한 사람이야,” “저 위세 좀 봐봐” 등등의 부, 건강, 명예, 권력에 대한 경탄이 아닙니다. 단지 한 이유 ‘토라를 묵상하는 사람’이라 행복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와~ 행복하겠다. 그 사람은 있잖아, 어떤 사람이냐면 . . .”을 이어받는 신약의 문구, 마태복음 5장 예수님의 팔복의 “blessed are those who/μακάριοι (makarioi)”의 문장들도 전형적인 ‘행복’에 대한 예상을 뛰어 넘듯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의를 위해 굶주린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순수한 자, 화평한 자,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 예수님 때문에 모욕 당하는 자 . . .”를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들어가는 행복한 사람이라 하니까요.
“와~ 행복하겠다. 그 사람은 있잖아, 어떤 사람이냐면 . . .”을 마른 땅에 선 나무에게 저도 잘 설명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른 땅에 선 나무라도 그 옆에 강물의 길이 생기길 기도합니다.
김카리스 (구약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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