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vs. 새활용품
김카리스 (구약학 박사)
질문을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같은 실수를 하는 내용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름다운 아내 사라로 인해 자기 생명이 위협당할까봐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만 말합니다 (창세기 20:1-2). 이복누이였기도 했으니 반쪽짜리 진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죽음에 관한 기사 이후 26장에서 그 아들 이삭도 그랄에서 사람들이 물을 때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삭이 리브가에게 오촌 당숙쯤 되니 누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처럼 반쪽짜리 진실도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말의 이유는 같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창 20:11; 26:7). 제가 받은 질문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실수를 알았냐는 것이었습니다. ‘알았으면 같은 실수를 했을까?’ ‘알았다면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담겨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답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명확히 적혀 있지 않으니까요. 다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실수를 거울삼아 교훈을 주는 일에 더 열심이었더라면, 혹은 아들이 아버지의 교훈을 더 주의 깊게 들었더라면 이방 왕들에게 책망을 듣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저에게도 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 두 가지의 반복되는 실수를 통해 성경은 사람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대조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실수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아내를 지키셔서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약속과 그 자손을 통해 이루시려던 계획들을 다 이루어 나가셨으니까요.
시편 78편은 시편 중119편 다음으로 가장 긴 시편입니다. 긴 시편이 대부분 그렇듯 역사시입니다. 특별히 1절에서 8절은 자신들의 역사를 이 시편에 기술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조상에게 들은 것, 그들에 대해 전해진 것을 현세대가 자손과 후대에 알려야겠다는 다짐입니다. 여기서 조상은 히브리어로 ‘아버지’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אָב (‘āḇ) 의 복수형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아버지들이 전하는 그들의 아버지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중요한 교육 수단이었습니다. 식탁에서, 절기 때마다 아버지들은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4절)” 전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그들의 조상들, 아버지의 아버지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 (8절)”의 실상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들의 과거는 어떤 학자의 표현대로 “골동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후세에 롤 모델로 Upcycling 되어, 새로 활용되는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78편의 표제어는 아삽의 마스길(מַשְׂכִּ֗יל/ maskiyl)입니다. “a contemplative poem or song,” 즉, 교훈을 목적으로, 지혜를 주는 ‘묵상하게 하는 시나 노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찬양 리더였던 아삽, 헤만, 여두둔, 에단, 그리고 고라 자손들이 어떻게 이 시로 찬양을 인도했었을지 이 표제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마스길’이라는 표제어는 회중이 가사를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서로 주고받는 “교창”을 하거나 잠시 연주를 멈추라는 지시로 보입니다. 즉, 차분하고 깊은 호흡으로 공동체가 이 시편을 낭독하면서 이 시편에 들어 있는 “기억하라, 고백하라, 들어라, 소망하라”라는 명령을 되새기며, 따랐을 것입니다. 명상적인 템포에 맞춰 아버지들의 과오도 내 삶에서 함께 뉘우치고, 미래의 길잡이와 권고로 새겨질 찬양 방법이었습니다.
시편 78편의 “소망”의 지향점은 “하나님”이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7절).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과 함께 아버지들의 과오가 묵상 될 때 우리는 실패도 새활용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주일에 아버지들의 역사를 업싸이클링 해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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