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그 자리_김카리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그는)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그는)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낮아진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그는)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그는)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편 146편은 시편 전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다섯 개의 “할렐루야” 시편 중 첫 번째 시편 입니다. 다섯 개의 시편 모두 각각 “할렐루야”가 첫 단어이고 “할렐루야”가 마지막 단어 입니다. 그 “할렐루야” 사이의 시 내용은 ‘누가, 누구를, 언제, 왜’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 영혼”을 소환하여 찬양할 것을 명령하고, “여호와”를 “내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생전에,” “평생에”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왜 여호와를 찬양해야하냐면, 다른 권력자들, 즉 하나님이 아닌 인생들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될 뿐이기에 ‘도울 힘이 없으니까’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달리 이러 이러하니 그 분을 의지하고 찬양하라고 설명하는 내용이 앞에 적은 6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모두 여호와의 행적과 성품, 성향을 열거합니다. 특히나 “여호와”라는 주체가 행한 일들이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를 볼 때 그의 성품과 성향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억눌린 사람들, 주린 자들, 갇힌 자들, 맹인들, 낮아진 자들. . . 모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또한 보십시오. 그들의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여호와는 억압당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고, 배고픈 사람의 배를 채우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시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시고 낮아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런데 이들과 결이 좀 다른듯한 대상과 여호와의 행위가 다음에 나옵니다. “의인들”인데,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인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후 “의인들”의 반대어인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는 여호와를 기술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제외한 모든 유형의 사람들은 ‘취약 계층’으로 뭉뚱그려 지는데 의인과 악인은 유일하게 도덕적, 윤리적 범주로 보이는 것이 독자들에게 의문을 낳습니다.
이에 대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결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의 정의가 시편 146편의 시인의 정의와 다름을 아는 것입니다. 시인의 의인은 앞에 열거한 사람들 전체를 포괄합니다. 즉,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구원할 힘이 없어 오직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는 절실한 사람들, 여호와 앞에 겸손한 사람들, 낮아진 사람들을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체적, 경제적 고통 뿐 아니라 사회 구조 안에서 법적, 제도적 보호가 없는 억압 받는 자들, 법적 대변인이 없었던 이방인, 고아, 과부들이 여호와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의인’으로 용납하십니다.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 부분이 이 설명에 힘을 더합니다. 의인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그 분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시편이 명시하니까요. 더욱이,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는데 야곱은 도덕적 의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형의 약한 부분을 틈타 장자권을 가로챘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거짓말로 속여 축복의 기도를 쟁취합니다. 우발적 거짓말이 아니라 작정하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는 ‘기만하는 자(supplanter)’의 대명사로 여겨집니다. 그 결과 그는 부모와 집을 떠나 고아처럼, 나그네의 신세가 되고, 굶주리며, 라반에게 억압당하고, 종으로 갇힌 자처럼 노동에 얽매이게 됩니다. 나그네였던 벧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엎드러진 자가 되었던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받고,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 받습니다. ‘속이는 자’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 ‘야곱’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자기 힘이 부서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도움으로 삼습니다. 호세아 12장은 야곱의 태생적 기만성을 상기시키며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죄악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라고 해석합니다 (3-4절). 그리고 사람들에게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라고 권면합니다 (5-6절).
장자의 자리를 빼앗으려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야곱은 시작부터 도덕적 의인일 수 없었습니다. 형의 옷을 빌려 입고 아버지를 기만한 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지점들, 부서진 그 자리에서 여호와를 바랄 때 여전히 기만이 그 속에 있었으나 의인이 받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언약이 실현되는 때가 되고 후대에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도 생깁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됩니다. 울며 엎드려져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고 그 소망을 그분께 둘 수 밖에 없는 자리의 은혜입니다. 어쩌면 시편 146편의 시인도 그래서 여호와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를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시인은 1절에서 “내 영혼”을 소환하더니 마지막 10절에서는 도시 전체 “시온”에게 외칩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찬양의 자리로 가야겠습니다.



![[칼럼: 구약의 베일을 들추며] 야만과 여명](https://christiantimes.ca/wp-content/uploads/oldtestament0213-324x16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