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 18 겸손, 그리스도의 숨결을 따라
앤드류 머리의 『겸손』은 기독교 고전으로서 겸손의 진정한 의미와 그 무게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자기 과시와 화려한 ‘디지털 자아’를 구축하며 살아가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내면은 깊은 영적 공허함에 시달리기도 한다. 종종 교회에서조차 겸손이 세련된 처세술로 전락한 때에 겸손은 단순한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깨어진 피조물의 본질을 회복하는 ‘생존의 선언’이라는 것은 의미가 깊다.
앤드류 머리는 겸손을 “은혜가 뿌리내릴 수 있는 유일한 토양”이자 “모든 덕의 뿌리”라고 정의한다. 겸손 없는 모든 영적 활동은 결국 자기만족이라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이제 피조물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겸손의 진정한 정체를 재정립해야 한다.
앤드류 머리는 겸손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 창조의 질서 속에서 누렸던 ‘본래적 영광’이었음을 역설한다. 인간은 매 순간 그분의 능력으로만 유지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의존관계”에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아무것도 아님’ (Nothingness)을 깨닫는 것은 비하가 아니라 ‘해방’이다.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빈 그릇’이 되는 것이야말로 피조물의 가장 복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 가지 겸손의 동기를 제시한다. 피조물로서(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죄인으로서(교만으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복구하기 위해) 성도로서 (구속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다시 참예하기 위해).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면에 침투한 ‘은밀한 독’, 즉 교만 때문이다. 교만은 단순히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지옥으로 이르는 문이자 지옥의 현시” 이다. 타락한 천사들이 어둠으로 쫓겨난 이유도, 아담이 비참하게 전락한 이유도 모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의 욕망 때문이었다. 교만은 지극히 종교적인 모습으로 변장하여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성도들 사이에서 은밀한 교만의 증상들이 있다. 판단의 날카로움( ‘솔직함’을 핑계로 타인의 연약함을 성급하고 날카롭게 비판함) 사랑의 결핍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타인의 필요와 감정에는 무감각함)자기 추구의 교묘함(사역과 봉사 속에서도 결국 자신의 명예와 유익이 최우선임) 독선적 확신(자신의 의견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 믿으며 타인에게 무례를 범함) 이 치명적인 독을 제거할 해독제는 오직 그리스도의 겸손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 자체로 ‘겸손’이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뿐 아니라,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 속에서 철저히 ‘아무것도 아님’의 자리를 지키셨다. “아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19),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요 5:30). 주님의 모든 권능은 바로 이 ‘철저한 빈 그릇 됨’에서 흘러나왔다. 오늘날 성도들이 무력한 이유는 ‘무언가가 되려고(Something)’ 애쓰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비워 ‘Nothing’이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Everything’ 으로 나타난다.
겸손은 은혜가 거하는 유일한 토양이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사람은 반드시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다음의 3가지 영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의지의 전폭적 동의: (하나님이 내 안에서 전부가 되시도록, 매 순간 나의 주권을 포기하고 그분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죄인의 자리 고수 (구원받은 후에 내가 ‘은혜로만 서 있는 죄인’임을 잊지 않으며, 오직 그 은혜만을 나의 유일한 자랑으로 삼는다) 타인의 발판 되기(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피차 복종”하며, 기꺼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섬김의 자리에 선다)
교만과 겸손 사이의 전쟁은 인간의 영혼을 두고 벌어지는 영원한 전쟁이다. 겸손은 우리의 노력으로 도달하는 도덕적 고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어 친히 일하시는 과정”이다. 진정한 승리는 나를 높여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세상의 발판”이 되기를 갈망하는 헌신에서 시작된다.
겸손의 심연으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당신은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참된 생명의 영광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겸손은 다른 덕목과 더불어 나타나는 은혜나 덕성이 아니라 모든 덕의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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