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에서 부르심으로 Not by Eagerness But by Calling (행 9:1-19a)
에드먼턴 온 교회 진성인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몇 주전부터 사도행전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께서 약속대로 임하시고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며 교회가 시작되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는 꽃 길만 걸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믿지도 않으며 오히려 핍박하던 그 시대 속에서 반대와 핍박받기를 거듭했지요. 하지만 사도들은 그 어려운 시간 속에서 오히려 믿음을 꽃피우며, 사람들의 반대 때문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봄인지 자꾸 잊고 눈도 내리고 바람도 불고 쌀쌀해지기도 하는 에드먼턴에서 그 변덕스러운 날씨를 이기고 꿋꿋이 싹을 틔우고 파릇 파릇 하기 시작하더니 제법 푸른빛으로 가득해진 저 풀밭과 나무들처럼, 첫 교회는 그렇게 맹렬한 반대에도 생명을 틔웠습니다. 겨우 겨우 버티거나 살아남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복음을 전하다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보며 ‘저 사람들이 예전에 그 사람들 맞아? 언제부터 저렇게 됐지?’ 라는 말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반대하니까, 비웃고 욕하니까, 혹은 누군가를 방해하기 싫어 복음 전하기 힘들다는 말은 그 시대엔 통하지 않았죠.
그런 사도들의 삶과 신앙을 배운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믿음과 용기가 남달랐습니다. 그들 가운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교회 공동체의 리더십인 집사로 세워진 이들은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교회를 잘 이끌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이었던 스데반은 질투와 시기에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에게 거짓말로 모함을 받으면서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처럼,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한다”고 말하며 용서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스데반의 고귀하지만 안타까운 순교와 함께 교회는 폭풍같은 고난의 시간을 맞게 됩니다. 사도들 외에는 모두가 흩어져야 하는 수난의 시간을 지나게 됩니다.
한번의 설교에 수천 명씩 믿고 돌아오며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성도들은 곳곳에 도망치며 흩어졌습니다.
교회 최고의 위기이며 흑역사라고 보이는 순간이지요. 그 흑역사를 주도하던 한 사람이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행 8:3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볼까요?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 But Saul began to destroy the church. Going from house to house, he dragged off men and women and put them in prison.
그러나 결과부터 생각해 보면요. 그렇게 뿌리채 흔들리며 가루처럼 흩어지고 부서질 것 같은 시간 속에도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한 곳이 아닌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퍼졌습니다.
행 1:8 말씀에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그대로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교회는 핍박의 역사 속에 이제 사마리아에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지난 주중 말씀에 나왔던 사마리아 전도의 주역~ 누구였죠? 일곱집사 중 하나였던 빌립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권능을 행하고 말씀을 전해서 사마리아 성 자체를 변화시켰죠. 그 능력과 은혜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사마리아에서만 일하고 이정도면 Good enough 라고 하고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그를 부르고 성령이 그에게 지시하신 것이 있었거든요. 그는 남쪽 광야지역으로 가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났고 성령의 지시대로 다가갔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이런 만남의 축복이 있었겠지요? 성령께서 누군가를 보내주시거나, 혹은 성령님의 지시로 누군가에게 나아가 생명과 복이 되었던 만남 말입니다.
아무튼 빌립은 성령의 지시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고 성경은 이후 그들이 재회했다든지 빌립이 에디오피아 가서 As를 했다든지 하는 것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시를 통해 에디오피아에 복음이 전해졌을 것을 저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죠.
이렇게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발돋움이 시작되었을 때 성경은 한 사람에게 핀 조명을 비춥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교회를 없애려고 날뛴 사울입니다. 참으로 당황스럽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교회를 뿌리채 뽑으려 했던 사람, 복음의 전파를 목숨 걸고 막았던 사람은 로마 사람이나 다른 신을 믿는 이방인이 아니고요.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율법을 제대로 배워 지적 수준과 삶의 질도 무척이나 높았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무늬만 유대인이 아니라 바리새인, 즉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율법을 가르친 율법교사 가말리엘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행 5장에서도 그의 말 한 마디에 공회에서는 붙잡혔던 사도들을 놓아주기도 했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 아니면 사도들의 복음 증언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지만 혹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대적할까 조심하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스승만큼 신중하지 않고 열심이 지나쳤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라는 지중해 연안의 무역도시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후 가말리엘에게 율법도 엄격하게 배웠지만 이전에 경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뛰어난 다소에서 로마시민권자로 태어난 유대인이어서 율법 외에 세상 학문이나 이치에도 능한 사람이었죠.
한 마디로 똑똑하고 잘 나가는 거침없는 사람이었는데 열심까지 넘치니 그는 자기가 볼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망설임없이 나선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성도들을 잡아 가두며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던 그는 다메섹이라는 도시까지 진출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무려 240km 떨어진 곳입니다. 에드먼턴에서 캘거리까지 300km 정도니까 에드먼턴에서 에어드리 정도 거리 좀 안 되네요(260km)
여러분은 상상이 되십니까? 이단이 찾아오면 문 잠그기 바쁜 우리인데,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잡으러 그 먼 길을 쫓아갔다는 게 상상이 되세요?
하지만 핍박받아 흩어진 사람들이 다메섹으로 많이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어요. 살기가 등등해서 잡으러 갔습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바로 그 때 그의 걸음을 멈추게 만드신 분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예수님이셨죠. 왠만해선 막을 수 없는 그를 일단 빛으로 둘러 비추십니다. 강한 빛에 사울은 더이상 나갈 수 없었죠. 그와 함께 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땅에 엎드러진 그를 예수님은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행 26:14에서 이를 회상하는 바울은 예수님이 이 때 하신 말씀 한 마디를 더 말했습니다.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혹 사울같은 이가 있습니까? 저는 성장과정에서 영적인 방해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모태신앙인인 저는 오히려 새벽마다 일어나 가정 예배드리는 게 힘들었지, 예수님 못 믿게 하는 가족은 없었습니다. 군대에서도 군종병이라 군목 목사님이 못 일어나셔서 갑자기 새벽기도 인도 해야 하는 고충은 있었어도 왜 교회 가냐고 맞거나 괴롭힘 당한 적은 크게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은혜이며 눈물의 기도 덕이라는 걸 몰랐던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고난 총량의 법칙이 있는지 뒤늦게 다른 방면으로 하나님께서 연단을 주시는 것 같기는 합니다.
분명 지금도 가족 중에 주변에 가까운 이들에게 영적으로 핍박받는 이들이 있지요. 저는 지난 주중에도 그런 어려움이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가족을 영적으로 훼방하는 분들이 알고보면 세상 무지하고 무식한 분들이 아닙니다. 지적 수준도 높고 고상하고 가족도 사랑하는 이들인데 자기 배우자 혹은 자녀가 예수 믿는 건 두고 보지 못 해요. 참 무서운 일이죠.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줍니다.
지금도 예수님 믿는다고, 혹은 예수 잘 믿으라고 한다고 핍박 받는 일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막히지 않습니다. 교회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라진 지역교회들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복음의 전파와 성령의 권능은 계속 됩니다.
이제 다시 사울 이야기로 돌아가봅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강권적인 만남에 압도 되었습니다. 그는 더이상 핍박도 반박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그는 더이상 스스로 뭔가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울은 누구를 의지합니까? 먼저, 8절에 나오는 대로 그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끌려서 다메섹에 들어갑니다. 그가 자기 발로 당당히 그 곳에 들어가지 못 할거라곤 1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 믿노라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 때가 있죠. 계속 그래도 큰 문제 없어 보이면 멈출 줄 모르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지기 전까진 말입니다.
두번째로,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다시 보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지시하셨기 때문이죠. 아나니아는 성도들을 괴롭히는 사울을 돕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주께서 주신 명령이기에 사울이 눈을 뜨게 안수 기도할 뿐 아니라 사울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도록 기도까지했습니다. 이 또한 사울은 바라거나 구한 적도 없는 일인데 주의 강권적인 부르심에 따라 이뤄진 일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이 왜 눈이 멀었고 왜 다시 눈을 떠 성령충만함을 입어야 하는지 알려주셨지요.
15절 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But the Lord said to Ananias, “Go! This man is my chosen instrument to carry my name before the Gentiles and their kings and before the people of Israel.
놀라운 일이죠? 유대 그리스도인을 붙잡으러 다니며 헛된 열심으로 주의 복음을 방해하던 그를 주께서는 부르셔서 그가 가진 열심으로 이방인과 지휘자들과 유대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려 선택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 보기에 고약하고 못된 사울이었죠. 그 스스로도 이후에 자기는 죄인 중 괴수라고 할 정도로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가진 열심을 선한 복음의 역사, 생명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려고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이후로 사울을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사울이 의지하게 된 세번째입니다. 즉 사울은 이제 부르심 Calling!만을 의지해 살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을 굳게 하시기 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가 사람들 손에 이끌리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손을 굳게 잡아 이끄셨습니다. 이후 사울은 바울로 불리며 로마가 통치하는 이방 지역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고위관리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한번도 생각하거나 꿈꿔본 적 없던 일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일어난 것이죠.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유턴해서 다시 유대교나 자기 열심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을 이끄는 분이 누구인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행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And now, compelled by the Spirit, I am going to Jerusalem, not knowing what will happen to me there.
자기 계획과 의도와 열심과 힘과 지식대로 움직이던 그는 이제 자기가 가진 배경, 지식, 경험을 모든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갑니다. 성령에만 이끌려 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지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가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이길 이 괜찮아도 그리 안 가고, 나는 저쪽으로 가고 싶어 가지 않고,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는 겁니다. 그 길이 안개가 자욱하고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 해도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 안에서 가는 길은 이와 같습니다. 교회 다니며 예수 믿고 성령 받아 알만한 분들도, 성령께 매여 충만하게 인도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확실한 거, 안전한 거, 누가 봐도 괜찮은 길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이나 사울이 간 길이나 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이제 유대식 이름인 사울보다는 로마식 이름인 바울로 더 알려질 정도로 디아스포라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사울은 작은 자라는 이름에서 바울, 큰 자 이름이 되었다는 설교를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그 이름들은 어느 나라식 이름이냐일뿐입니다. 너무 확대해석은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방인의 사도로 산 바울의 삶은 충분히 존귀하니까요.)
예수님을 부인하는 유대땅에서 사울로서 복음을 전하기도 물론 힘들었겠지만, 예수님을 아예 모르고 온갖 잡신이 난무하고 잘난 척하며 잘 먹고 잘 살기 바쁜 이방지역들에 복음을 전하는 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매맞고 헐벗고 갇히고 죽었다 살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다시 사울 시절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부르고 만나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큼 안전하고 완전한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그의 힘과 능으로 살지 않고 오직 주의 영, 성령에 매여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는 성령 충만한 그 한 사람 바울을 통해 행 1:8 말씀의 약속을 이뤄가셨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은 땅끝을 향해 점점 확장되어갑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우리에게까지 전해졌고 이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귀한 열심과 헌신을 가진 성도님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가장 원하고 명하시는 것, 그 복음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해야 하고요. 복음 전하는 것과 상관없다면 지금이라도 멈춰야합니다.
오직 부르심에 이끌려 이것을 하기도 하고 저것을 하지 않기도 해야 합니다.
성령강림주일에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 안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오직 성령에 매여 말씀에 순종하여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는 작은 예수 또 하나의 바울, 세상을 살리는 그 한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