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뒤 돌아 선 사람들(막11:8-10) – 런던은혜교회 정삼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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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돌아 선 사람들(막11:8-10)

런던은혜교회 정삼열 목사

오늘은 종려 주일(Palm Sunday)입니다. 종려 주일이라 함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뜨거운 열광 바로 몇일 뒤에 사람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이러한 온도차는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과장되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마음과 그만큼 예수님을 향해 철저히 고개 돌리고 원망하는 마음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순진하게 사랑하고 기대하였으나 결국 예수님께 뒤돌아 버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돌아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라고 외치고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예수님을 환영했으나 이후 도리어 폭도가 되어 예수님을 저주한 무리들 입니다.

그들은 큰소리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겉옷을 깔고 왕이나 개선장군이 돌아올때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이 ‘호산나’라는 외침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호쉬아나’(הושיעה נא)의 아람어식 발음으로 알려져있는데 특히 시118:5절에 나오는 이 단어는 초막절 의식에서 제사장들이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을 할 때 암송하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호쉬아나’(הושיעה נא)라는 외침은 예전 광야의 조상들이 겪었던 것이 갈길을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연명 해야하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인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고 몇백년을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던 이스라엘에게 짧게지만 독립국이 되었던때가 있었으니 역사적으로 엄청난 폭군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때 유대장군 마카비가 혁명을 일으킨 시기입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하누카(Hanukkah, 수전절)이지요.

마카비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올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그를 환영했는데 종려나무는 바로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마카비처럼 자유국가의 영광을 줄것으로 기대했겠지요. 메시야라고 불리우는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 로마의 지독한 폭정으로부터 구해주실 것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왕궁을 점령하고 군대를 일으켜 로마제국을 몰아내줄 것이라 생각했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세도가들을 찾아가 힘을 규합하고, 군대를 일으키고, 기적으로 히브리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주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약한사람, 병든사람, 귀신들린 사람들과 함께하시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작은 힘이라도 더해야 할텐데 오히려 돈과 실세를 가진 권력자들을 가차없이 나무라셨으며, 더 나아가 로마를 뒤짚어 엎기는커녕 로마에 잡혀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들이 가졌던 기대만큼 예수님을 더 미워하고, 증오하는 감정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금세 예수를 잡아 죽이라고 하고, 십자가 메고 골고다로 오르시는 주님께 욕설과 침을 뱉어대는 폭도로 변해버렸습니다. 

결혼생활 오래하신 분들은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내 삶에 꼭 필요한 ~~한 것들을 만족시켜줄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기대하고, 믿어왔는데 실상 살아보니 내가 상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말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기대만큼, 열정의 크기만큼 배신감, 분노감이 두배로 느껴지는것이지요.

연애 할 때에는 ‘세심’하고 ‘감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지나치게 ‘소심’하고 ‘감정적’인 남자였던 겁니다. 

연애 할 때에는 씀씀이가 호쾌해서 좋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나한테만 그런게 아니라 원래 사람이 좋고 오지랖이 넓어서 아무한테나 막퍼주는 남자였던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속인 사람도 거짓말 한 사람도 없지요. 내가 흥분해서 나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만큼, 내가 소망하고 기대한 것의 크기만큼 그것이 깨어졌을때 억울함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판타지를 가졌던 무리들은 자기들의 기대가 끝난 자리에서 폭도로 변해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에게 특별히 택함을 받아 삼년간 예수님을 성실히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예수님을 따랐고, 존경했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자주 감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어느 정도였던지 제자 중 한 명은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까지 다짐했었지요.

이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내심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되면 한자리를 꿰차고 그분의 우편과 좌편에 앉아 세상을 호령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서 서로 서열을 가리려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때로는 제자들의 어머니가 등장해서 치맛바람을 날리며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이 세우실 나라에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삼아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그러한 이야기에 발끈하여 서로 “내가 더 중요하네, 더 높네” 하는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궁으로 입성하기는커녕 자기 죽음을 예고하시고, 십자가를 질것이라는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병사들에게 잡혀갈 때 자신들의 수고가 영광과 보상이 아니라 죽음과 불이익으로 돌아올것만 같았지요. 이들은 뿔뿔이 흩어질 뿐만 아니라 철저한 배신감으로 인해 “아! 내가 헛된기대를 했네. 차라리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꺼야”라며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피해 안주고 내가 피하고 말지’라고 마음먹는 보통 소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기대가 끝난 지점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자기 갈 길을 찾아 떠나 버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은 삼십세겔에 팔아버린 가룟유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룟 유다는 사탄의 수하요, 가장 악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역사적인 가룟 유다 사이에는 많은 간격이 있어 보입니다. 아니 스펙과 배경으로만 놓고 보자면 그는 제자들 중에 가장 제자의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이유의 첫 번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이 아니었습니다. 12명 외에도 70인이 등장하기도 하고 제자들이라고 표현하는 불특정 다수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12명이라는 것은 ‘12지파’, ‘12장로’등 유대인들의 완전수의 상징입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나 아무나 이 열두명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12명중 하나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주목 받는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는 유일한 유대 남부 ‘그리욧’출신, 오늘날로 치면 모든 제자들이 다 지방 변두리 출신인데 반해 가룟유다만 유일한 대도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정보통신의 발달로 변두리와 대도시의 차이가 크게 없지만 그 당시에 대도시 사람과 시골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두가 다 동막골 출신인데 한명만 뉴요커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 중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가장 빠른 사람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세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회계라는 중책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직업이 다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알려져있는 것은 네 명은 어부였고, 한명은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중 당시의 회계사격인 세리 마태가 아니라 가룟 유다가 회계를 담당했다는 말은 그가 전문 회계사에 준하거나 아니면 더 뛰어난 행정력과 빠른 계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 공동체에서 회계는 아무나 맡기지 않습니다. 가장 똑똑하고 가장 믿을만하고 가장 공동체를 잘 이해하는 리더쉽 격에게 맡겨지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그 당시에 살면서 가룟 유다를 직접 보았다면 어쩌면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꾸부정하며, 악랄하고, 비겁하고, 음흉한 사람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세련되고 당당한 사람, 열정과 능력이 특별하며 한 공동체의 리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가 과격하게 돌아섰을까요? 가룟 유다는 셀롯(Zealots) 즉,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열심당원은 로마의 압제에 실제로 무력으로 싸움을 이어나갔던 애국주의자들이었고 오늘날로 치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명분을 이뤄야 한다는 극우노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그분이 메시야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메시아 인식은 그들을 압제국가로부터 구테타로 전복시켜줄 카리스마 가득한 군사지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도 베풀고, 충분히 매력적인 분이었지마는 예루살렘까지 입성하고 보니 전혀 내 기대를 이루어줄 사람이 아니었음에 분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당시 노예 한사람의 몸값이었던 은 삼십냥에 예수님을 넘긴것은 상징적인 실망의 표현, “저 필요 없는 사람을 헐값에 팔았다”로 해석됩니다. 

역사는 가룟 유다를 배신자로 고발하지만, 입장 바꾸어 가룟 유다의 시선으로 볼때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을 속인 배신자였을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룟 유다는 오늘 우리 가까이에서 찾아볼수 있는 너무 평범한 종교인의 전형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내 기대와 소망을 가득담아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가도 주님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를 때 왜 나를 속였냐고 억울해하고, 내 열심과 수고에 배신당했다고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없는 것 같다고”, “이때까지 내가 어떻게 섬겼는데 이렇게 대우해도 되냐”고 원망하면서 이때까지 자신들이 쌓아왔던 그 순수한 헌신, 마음들을 은 삼십같은 헐값으로 매도하는 모습인것입니다.

자신의 기대가 끝난 지점에서 소극적으로 떠나갔던 사람들, 분노하고 저주했던 사람들을 너머, 배신감의 댓가를 돌려받으려하는 사람들- 이들은 어찌보면 일상에서 만나 봤을 법한 평범한 얼굴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는 더 나쁜 놈의 상징이 아니라. 큰 기대와 열심을 가지고 따르다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속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저주하고, 끌어내리고, 가십거리로 팔아버리는 오늘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가룟 유다는 악마적인 사람이라기 보다는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중도해 포기해 버리는 사람의 전형이 아닐런지요? 나는 할만큼 했다고, 내가 상대방에게 수고하고 애썼던 마음들, 추억들 헐값에 팔아넘기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부터 그의 마음이 돌아선 것을 아셨습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을 배신하고 팔 것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얘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내가 기대하고 쏱아 부은 열정이 얼마만큼인데?”, “뒤에서 이렇게 못된 배신을 계획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라고 속이 터지고 열불이 터질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날 밤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배신할 줄 알면서 끝까지 사랑하는 것 말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호산나라고 열광했지만 폭도로 변해버린 사람들, 열심히 주님을 따랐지만 내 기대와 달랐을 때 주님을 떠난 사람들, 주님을 은 삼십에 판 가룟유다와 우리의 비슷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배신당했다고 여겼을 때 ‘거기까지만’ 사랑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고,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무리들의 마음, 다 떠나버린 제자들의 마음, 가룟유다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지만 주님같은 마음은 알아도 흉내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고, 심지어 하나님께 용서와 보호를 요청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목숨을 바꾸어 사랑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들 중 어느 자리에서 발견되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미 뒤돌아 섰었고, 이제 곧 뒤돌아 설 사람들은 아닙니까? 오늘 기대했던 것에 절망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제 사랑하려고 노력하다가 상처받아 낙심한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죄인들이 거역하신 것을 참으신 주님을 기억해 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형제자매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마태복음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내 삶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골고다를 따르지 않고는 그 어느것도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난주간의 한복판 이 사순절 고난의 축제에 초대하십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주님의 뒤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얻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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