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우상의 근원은 나로다(사무엘상 15:13 – 24)_하늘향한교회 신윤희 목사

우상의 근원은 나로다(사무엘상 15:13 – 24)

하늘향한교회 신윤희 목사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듣는다. 다양한 우상들이 존재한다. 종교나 정치, 특히 이 모든 것 위에 돈(재물)이 최고의 우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돈으로 안되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돈으로 가능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우상의 근원은 바로 ‘나’다. 즉 내가 바로 그 우상을 키우는 장본인이다.

십계명을 외워보자. 십계명 중에서 2계명이 무엇인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대척점에 바로 ‘내 자신”이 있다. 우상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한다. 우상은 바로 내가 시작하여 나를 투영하여 자신이 되고 싶은 것에 매진하게 한다. 아이돌, 연예인, 스포츠스타, 인플루언서, 백만장자, 남은 여생을 즐기는 이들이 내가 되고 싶은 최고의 모델이 된다.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시나? 인생은 자기 중심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대로 돌아가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명확한 순종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이 되어 마음껏 하나님처럼 놀고 싶어한다. ‘내가 하나님이면 좋겠는데, 내가 하나님어야 하는데, 왜 내가 하나님을 따라야 되는가’ 생각한다. 

진화론이 득세하는 이유는 그 이론에는 하나님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나를 좌지우지할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으니 얼마나 좋은가. 사실 인생은 누가 주인이냐의 싸움이다. 인생이라는 시간동안 그 싸움에서 우리의 위치와 자세와 태도를 배워야 한다. 이 땅에 인간들에게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이시다. 

정말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어쩌면 돈은 우상이 아니다. 우상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다. 자기를 우상화하는데 가장 협조적인 존재가 바로 돈이기에 돈돈돈하는 것이다. 자신을 우상화할 때 돈이야말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필수품이다. 성경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주어 돌이키도록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 선물이다.

우리 주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다보면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더 믿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팔뚝을 더 믿는 것이다.  이런 자신을 믿다가 사고나, 병들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무너지게 될 때에 다시금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면서 자기 자신의 우상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한다.

인명구조를 30년 하고 은퇴한 분에게 기자가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조하셨습니까?” 은퇴하는 분이 ‘2명입니다’라고 했다. “아니 30년 동안 겨우 2명이라고요?”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물었더니, “수백명의 인원을 죽기 직전에 구해주었지만 단 2사람만이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었지요.”라고 했단다. 구조를 받은 사람이 ‘자기는 운이 좋아서 산 것이지 인명구조사 때문에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만 생각하니 구해준 사람에게 감사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오늘 본문의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가. 우리 둘째 아들이 수련회에 다녀왔다. 꼬마 때는 일일이 짐 싸는 것을 도와주었지만, 초등학교 이후에는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 짐을 어떻게 싸고 챙겨가는 지 알아서 하라고 일부러 챙겨주지 않는다.

아내가 걱정이 되니 혼잣말로 “아들이 짐을 잘 싸갔나? 추울텐데 혹시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라고 하였다. 그런데 저는 속으로 ‘만약 아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해서 짐을 제대로 챙겨가지 못해 추워서 감기에 걸렸다고 한다면, 오히려 나는 ‘잘 되었다’라고 한다. ‘왜 잘못된 것인가?’라고 되뇌이는 그 순간을 통해 배우게 된다. 다음 수련회에는 잘 챙겨가지 않겠는가. 경험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지난 아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줄려고, 다진 마늘을 넣으면 맛있다고 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투명 플라스틱 통에 노란색의 다진 마늘이 보였다. 그래서 투하했더니 맛이 영 이상한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보니 다진 생강이었다. 마늘하고 생강이 색깔이 비슷해서  전혀 몰랐다. 그러나 맛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 사건을 통해 같은 색이라고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 것이다. 앞으로 동일한 상황이 된다면, 먼저 냄새부터 맡아보고 제대로 확인부터 하지 않겠는가.

‘한 번 실수는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여러 번의 동일한 실수는 그 사람의 실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사울이 그렇다. 이스라엘의 전쟁이 계속된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나 몰라라’ 하고자기는 석류나무 밑에 있다가 아들 요나단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라는 명언을 남기며 전투에서 승리한다. 절벽을 기어 올라간 요나단과 함께 단 2명이 적군 20명을 죽이게 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 블레셋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 전투에서 이런 멋진 승리를 하는 과정에서 또 사울은 이상한 명령을 한다. 금식하라는 것이다. 전투할 때 왜 금식하라는 명령을 하는가. 몽골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이유가 말을 잘 다루어 멀리까지 이동수단을 확보한 점과 육포를 만들어 먼 거리를 가더라도 전투식량을 확보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울은 지금 전투 중에 있는 군인에게 금식하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다 죽이겠다고 하니 이 무슨 회괴망측한 명령인가. 군대에서 각개전투한다고 한 번 뛰고 나면 한 시간도 안되어서 소화가 다 되어서 엄청 배고픈 상태가 되고만다. 군대 종교행사에 어느 종교가 어떤 간식을 주느냐에 따라 종교를 바꾸어 참석하는 것을 모르는가. 이런 명령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이 사울왕의 명령을  적진에 가서 전투를 하느라 듣지 못했던 요나단은 나중에 이 사울의 금식명령을 모르고 전투하다가 꿀을 먹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사울 자신의 영락없는 명령 때문에 요나단은 죽게 되었다. 그 때 백성들이 간곡한 호소로 말미암아 가까스로 요나단의 죽음을 묘면하게 되었다. 

지금 누가 하나님과 동역하고 있는지 백성들도 다 보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어쩌면 이 때부터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 것이 아닐까. 자신 명령대로 했다면 요나단이 죽었을 텐데 어쩌면 백성들의 아량으로 이렇게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명령이 사울에게 다시 임한다. 사무엘상 15장 3절에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하신다. 명령은 분명했다. 그런데 사울은자신의 해석과 견해를 몰래 끼어 넣는다. 이 해석의 결과는 전혀 다른 양상과 방향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 하루를 분명히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땅의 것을 해석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느냐 자신에게 두느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 진멸하라는 명령에 사울은  불순종하게 되었는가. 내 눈에 보기에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 진멸하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가치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했다. 

선택적 순종이 있었다. 선택적 순종이라는 말에 우리는 사실 그 누구도 온전하게 ‘나는 100% 순종했다’고 할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우리는 다 실수한다. 어쩌면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이키면 된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또 다른 새로운 기회를 준다. 그럼 그 때 회개하면 된다. 

사울은 그런데 이런 좋은 기회에도 오히려 백성들에게 핑계를 댄다. 이제 사울은 하나님은 사무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로 바꾸는 것이 아닌가. 이 대목에서 사울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다. 자신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무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어쩌면 사울을 왕으로 선택할 때는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였다.  겸손하고 성실했던 그 때, 자기 자신이 우상이 아니었을 그 때였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 이었는지를 재차 확인한다. 다시 돌이키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냥 벌 주려고 하면 이런 말이 필요 없다. 그러면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으면 돌이키면 된다. 

그런데 사울은 이 기회를 다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된 자,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왕이 된 자는,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 이에게 작심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20절에서처럼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당신의 여호와가 가라는 길로 가서 전쟁을 하고, 나 때문에 이겨서 아말렉 왕까지 전리품으로 데리고 왔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은근슬쩍 백성들에게 핑계를 돌린다. 남에게 핑계를 대는 상황이면 사실 회개의 기회는 상실된 것이다.

22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결국 사울 왕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고 선언한다. 100%의 순종을 못해서가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핑계를 대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에 “신앙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기 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 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라고 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인격과 인격사이에서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인격은 자동문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고, 하나님과 묶이는 것이다. 

하나님과 호흡하고 대화하고 밀고 당겨야 한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방향과 목적과 내용과 크기와 힘은 다 하나님과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영적 교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영적 교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전 인격에 걸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항복 그리고 그분을 닮는 데서 영적 교류가 드러난다. 사울은 지금 이런 영적 교류가 사라지고,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다. 내 안에 내가 만든 우상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핑계대지 않고, 하나님께 의중과 의도를 물을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사울은 그런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금식명령을 할때도, 백성들이 양과 소를 살려 왔을 때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상의 근원을 자기에게 둔 이유이다.

우상을 하나님이 만드셨겠는가.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우상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 우상을 마구 잡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만족시키고, 기쁘게 할 우상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서 오늘까지 키운 것이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자신에게 새로운 기준을 자기가 만든다. 이것이 우상이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께 기준을 두지 않고, 자기에게 묻고, 자신이 기준이 된다. 내 안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클 때 주의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한 것이 아닌가. 이제 우리는 사울로부터 배워야 한다. 반면교사로 그를 통해 배워야 한다.

사울이 그렇게 행동해 주어서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마음도 함께 들킨 것이다. 여전히 또 사울처럼 넘어질 수 있다. 괜찮다. 그러나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바로 서야 한다. 내 안의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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