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 중에 빛나는 믿음 – 룻기 1장 12~22절
노바스코샤 한인장로교회 안호진 목사
1997년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 남들이 정말로 다들 부러워하는 외국계 대기업의 임원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던 명문대 출신의 능력있는 남편을 항상 자랑스러워하는 한 여자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남편 애기를 꺼낼수 있는 기회가 올때마다 가슴이 뿌듯합니다.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다. 그 멋진 착한 나만 사랑해주는 그 남편 닮은 사랑스러운 자녀들은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IMF 여보야 나 오늘부로 구조조정되었어….여보 그럼 우리이제 뭐 먹고 살아! 어떻게해. 여보 걱정하지마. 우리 캐나다로 이민가자. 현재 있는 아파트 팔고 퇴직금 받아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보자! 그렇게 캐나다로 와서 20년을 세탁소, 컨비니언스, 식당, 안해본 것이 없고 고생 고생해서 드디어 자리잡았는데, 남편이 몸이 안좋다고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간암 말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6개월이 채안되서 남편은 60대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데, 캐나다의 명문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에 취업한 아들과 전문직으로 일한던 아들과 딸이 친구들과 함께 떠난 록키산맥 캠핑여행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천국으로 떠나보낸 이 분은 이제 더 이상 죽음과 이별, 고통 뿐인 캐나다에서 더 이상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고국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한 번 그 찢어지는 가슴으로 느껴보십시오! 주위에 분들이 위로합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고 힘을 내세요! 남은 생애 홀로 남아있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힘내서 살아가세요! 위로가 위로로 과연 전달될까요? 저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전 기원전 1000년경 저 멀리 유대땅에, 사사기 시대에 벌어진 나오미라는 한 믿음의 여인에게 벌어진 고통을 지금 여기 캐나다로의 이민과 다시 한국으로의 역이민이라는 가상 현실의 버전으로 바꿔서 말씀 드려보았습니다.
여러분 룻기 1장을 다함께 읽고난 지금 이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왜 진리일까요? 성경은 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나요? 그냥 가슴 뭉클하게하고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문학책이나 흔히 대박이 난 인문학 베스트셀러와 달리 왜 이렇게 이미 다 읽고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룻기처럼, 묵상하면서 할수록 왜 은혜가 될까요? 왜냐하구요 성경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정도로 무시무시할 정도로 현실적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바로 고통의 현실을 적나라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그분을 전심다해 사랑하는 자에게도 고통의 문제를 피할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성경말씀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고통의 문제는 반드시 내가 저지른 죄악에서부터 직접적으로 그냥 개인적 차원에서 모든 것을 이해할려고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룻기 1장 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제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하는 믿음의 여인 나오미 였을찌라도, 그녀가 살았던 시대가 바로 사사기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과 물질을 숭배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시대! 영원한 생명과 의와 진리되신 하나님을 철저히 버린 시대, 그 시대 전체, 그 타락한 유대인 공동체 전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말미암는 그 시대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 민족적, 공동체적 위기와 절망의 상황속에서, 실패하고 낙오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고, 무시받고 멸시 천대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우선 당장 모든 게 한 개인으로 바로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 역이민을 해서 나오미가 처한 상황을 한 한번 보세요.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자기 민족 외에는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을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자기네들끼리만 똘똘 뭉쳐사는 순혈 공동체에서 모압땅으로 이주한, 바로 이민을 가서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웬일입니가? 남편과 두 아들도 없어요. 왠 이방인 젊은 여자와 함께 터벅터벅 동네어귀로 들어옵니다. 아니 저 여자는 누구? 모압땅에서 얻은 이방인 며느리인가?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이런말 저런말 말 말 말 들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때, 나오미는 위로를 받을 마음의 준비가 전혀되어있지 않고, 더욱 더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그녀의 이름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제발 좀 여러분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절 “내가 풍족하게,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이 땅의 흉년을 피하여 저 멀리 타국 모압 땅으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믿음으로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서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매정하게도 다 데려가셨습니다. 빈털터리, 철저히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란 그 이름 뜻이 희락과 기쁨인데. 이제는 “마라”라고 불러라 즉 슬픔과 고통으로 불러달라! 우리식으로 할 것 같으면, 김희락 이기쁨 권사, 집사, 성도가 아닙니다. 저는 김고통 이슬픔 권사, 집사, 성도라고 불러달라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 동족들에게 애통하는 심정으로 그저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은 이렇게 고통 중에서 신음하는 이 권사 집사 성도님께 여러분은 어떻게 권면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이럴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냥 통상적으로 그렇게 다가갈 수 밖에 없지요. 안아드리면서 에고 얼마나 힘드세요! 하나님께 받은 마음의 상처가 크시네요! 그래도, 고백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그렇게 탓하시면서 그렇게 너무 자학하시지 마세요! 믿음이 약해지고 사그라들어도, 오히려 그럴때에 더욱 더 아니 말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더욱 더 믿음으로 간구하고, 고통 중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보세요! 아 그러면, 정말로 믿음 좋았던 이 권사 집사 성도님이 이렇게 하나님 탓하고 원망하고 다니고 아예 이름을 희락과 기쁨에서 고통과 슬픔으로 개명하시겠다고 공개적으로 교회 안팎으로 떠들고 다니시면, 전도는 커녕, 기존의 이분보다는 물론 덜하지만 그래도 나름 각자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 감사하며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에게 까지 이 교회 공동체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된다고 우리는 판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시대의 상황 안으로 들어온 한국의 크리스챤 이된 나오미 성도님께 은혜와 도전을 받기보다는 때론 너무 심하게 하나님을 탓하고 있어라고 그렇게 분명하게 보이는데, 정작 성경에서 룻기 1장에 이 하나님 말씀 본문 안에서 나오미의 이 밑바닥을 드러낸 믿음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쏟아붓는 원망과 야속함이라고 그녀의 신앙고백을 정죄하는 단 한 단어 아니 그 느낌이라도 있나요? 성경은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때는 우리의 신앙적 판단과 공동체적 경험으로 도무지 믿겨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탓을 하고 공개적으로 하고 있는 나오미를 전혀 탓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 그대로 보여주는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네 문자적으로 아무런 말씀없이 그러나 영적으로는 묵묵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랑하는 딸, 나오미를 안아주고 위로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정죄와 판단없이, 그냥 얼마나 힘들었어라고 하나님은 마치 결혼 생활과 이민생활에 철저히 실패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중년의 딸을 묵묵히 안아주는 노년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나오미가 하는 말, 하나님 대체 제게 왜 이렇게 하셨나요? 왜 제 이름은 희락과 기쁨으로 그 이름 지어놓으시고, 왜 이토록 남편과 두 아들을 데려가신 고통과 슬픔만을 주셨나요? 그런데, 룻기 1장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아십니까? 나오미야 나오미야 너가 나를 여전히 전능자로 고백하는 이 믿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단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는 실패자가 아니야! 너는 이방인 며느리 룻을 여기 유대땅으로 데려오지 않았느냐? 그것이 무엇이 대단합니까? 그 아이도 어차피 유대인 남편도 떠나보내고 모압 땅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이래저래 죽기는 매한가지이니 그냥 저와 함께 살든지 죽겠다고 함께 온것이이에요. 제가 대단한 것 없고, 그 아이가 효심이 특심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나오미를 칭찬하고 있음이 느껴지십니까?
여러분 모압 땅에 흉년이 지속되고, 유대 땅에 흉년이 그쳤다는 소문을 접하고서, 7~17절 본문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제발로 돌아가라” 할 때, 이방인 여인 며느리 룻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구약학자들은 이렇게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지금 이방 여인 룻이 전형적인 유대교 신앙고백의 형식과 문장을 사용하면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살겠다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바로 1:16~17절, 룻기에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향해서 너는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자로 인정해주고, 너의 믿음은 비록 연약해졌지만, 그 믿음은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불신자 이방인 며느리가 이렇게 고백하도록 너는 참으로 위대한 엄청난 선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친 것이야!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서 나오미를 인정해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여러분 다시 나오미의 신앙고백이 뭡니까? 나오미가 고국을 떠난 저 머나먼 타국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죽음으로 떠나 보내며 끔찍하게도 가슴이 3차례나 찢겨져 나가는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것 같으며 연속적인 죽음의 저주라는 고통을 그렇게 경험할 때, 내가 그저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하겠다고, 너무나도 성급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가나안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이민와서 그 불신앙의 죄값을 치루는구나!라고 밖에 생각이 안들지요! 아 바로 내가 내가 이민을 왔어도 이방인 며느리를 결단코 얻지 말하여야 했는데, 내 두 아들 불신자와 결혼을 시켜서 이런 끔찍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구나. 인생의 처절한 실패, 낙심한 심령, 거의 죽여서 꺼져 들어가는 믿음 이게 나오미의 믿음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 이방인은 며느리는 지금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을 형식 그대로를 빌려서 새롭게 하나님안에서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는 것을 선택한 불신자 며느리 오르바와 달리 이 며느리 룻은 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달린 생사의 문제의 달린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나는 죽더라도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여러분 쉽게 말씀 드려보면요. “아버지여 주여” 이런 표현, 신앙 생활 오래하신 분들 옆에 있으면 자동적으로 듣게 됩니다. 그분들이 아니 바로 우리들이 누군가도 보다 단 1년이라도 더 신앙생활을 더했다면,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아버지여! 주여! 대체 왜 그러세요! 왜요? 하나님? 왜 하필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자동적으로 1번이라도 더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역설로 다가옵니다.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전능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희락을 고통으로 기쁨을 슬픔으로 만들어버린 생지옥과 같은 상황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나는 자랑할 것이 없다. 인생의 절망의 터널의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영원히 침몰하여 심해로 가라앉아 이대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면 모압 여인 룻이 볼때는 그러한 고통의 문제 해결 못하는 무능하기 짝이 없고 어쩌면 알고도 허락하는 참으로 잔혹한 하나님, 뭐하러 믿나? 믿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시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결단코 될 수 없다. 되기를 결단코 원치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데, 정반대의 고백을 하고 있다고요! 아니 친정 어머니도 아니고 시어머니 라니까요? 여러분 여성 동지 여러분, 시어머니가와 친정어머니 누가 더 좋아요! 아니 솔직히 나를 낳아준 그것도 예수님을 믿는 친정 엄마에게도 때로는 상처를 받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불신자 며느리가 믿는 시어머니에게서 상처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받았지요. 그 유명한 고부갈등이 나오미와 룻 사이에는 전혀 없다구요. 아니지요. 있었을거에요. 그러나, 성경은 룻이 나오미의 삶 전부 인격 전체를 통하여 그토록 극심한 절망적인 고통에 떻게 반응했는지를 보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나오미가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이란 원시 농경사회에서 남자의 노동력은 곧 여인들에게는 생존권이었기에, 네 먹고 살길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물론 나오미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탓하고 있지만, 이름마저 바꿔달라고 동네방네 하소연하고 있지만, 룻에게 다가오는 거룩한 충격은 시어머니 룻은 그분을 만나서 지금까지 함께 사는 모든 날 동안에 여전히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여전히 그분을 마치 친정 아버지처럼 끝까지 의지하고 붙들고 있는 그 오래 세월의 믿음의 고백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며 이 결정적인 순간에 룻은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켜주게 되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고통과 실패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파괴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 연약하고 상처입은 심령과 지칠대로 지친 신앙일찌언정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삶의 존재 의미를 보여주게 됩니다. 전혀 긍정할 것이 없이 고통스러운 삶 자체일 찌라도 우리의 신앙은 우리 삶과 인격을 통하여 이웃에게 영향력을 미칩니다. 왜 시어머니는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의지하고 있는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당신은 반드시 살아나야할 이유가 있다고 여전히 스스로 고백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시어머님의 삶의 전반에 뿌리깊게 내린 산앙고백을 그대로 마치 엄마의 신앙을 딸이 그대로 따라하듯이 그대로 불신자 며느리가 그렇게 강력하게 고백하게 되었다는 진리를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18절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22절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은 인생의 절망의 터널을 결국 벗어나서 보아스를 결국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태양을 만나게 된것이이죠. 네 우리는 어서 러브스토리 성공스토리를 듣고 싶고 말하고 싶습니다. 네 긍정적인 것만 성공적인 것만, 죄, 고통, 실패. 죽음 이런 부정적인 것들은 어서 빨리 잊고 보내버리고 싶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 신앙이 지금 뜨겁고, 살아있고, 이 믿음으로 위대한 사역을 삶을 살아내고 말았다는 어떤 감정이나 결과 중심적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통의 신앙 고백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복과 치유와 네 구원의 은혜를 이미 준비하고 계셨고, 이미 전능하신 방식대로 그 분의 뜻과 방법과 시간에 따라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고 계셨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방인 며느리 룻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세주를 만나는 성도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룻의 믿음은 누구로부터 인격적으로 전달되었나요? 바로 고통 중에서 남편을 떠나보내고, 두 아들을 하나님께로 떠나보내, 어찌보면 말만을 들어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전능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바로 나를 저주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서 였습니다. 여러분, 1장1절이 사사기 시대의 흉년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1장 마지막절 22절 보리추수때에 만나게될 이 저주받고 망한 가문의 구속자 보아스를 끝내 만나게 될 것이라는 복선이 깔려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15절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우리 죄인들을 그 귀한 피로 값주신 사신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결단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찌보면 고통 중에 우리의 믿음의 밑바닥이 너무나도 처참하게 드러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위에 있는 자들이 끝까지 고통 중에 있는 교회를 바로 제가 부족해서요. 제 탓입니다 가슴을 치고 끝까지 그러나 하나님 바로 이 죄인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우리 나라를 살려주세요! 하는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고,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아니 전혀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그 고통 중에 빛나는 더욱 더 빛나는 믿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받고 돌아옵니다. 여러분, 저는 그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내 탓이오! 라고 회개하는 그런 대단한 믿음의 기도를 도저히 못올리겠어요. 제 마음 안에는 하나님께 야속한 마음뿐이요. 어디가서 믿음 없다고 욕먹을까봐 차마 말 도 못꺼내봤지만, 하나님은 지금 저를 버리시고 기쁨과 복은 모두 거둬가시고 슬픔과 고통만 주신다고요! 아니오! 그렇게도 너무나도 부정적이고 어찌보면 하나님을 원망 만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의 고백이 아닐찌언정, 바로 당신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사사기 시대와 같은 혼돈과 고통과 절망의 시대에 나오미처럼 믿음의 여인으로 불신과 두려움과 거짓에 붙잡힌 이 세대를 향하여 무한한 선한 영향력, 바로 불신자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초라하고 연역한 질그릇 같은 믿음에, 흙에 불과한 질그릇과 같은 우리 연약하고 초라하고 작은 믿음에 담긴 우리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갈 미천한 죄인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보혈을 아낌없이 흘리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바라보십시오! 바로 우리의 입술에 아버지여, 주여! 라는 고통의 신음일찌라도 주님께 그 힘겨운 고백마저도 올려드리는 일을 결단코 멈추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치유와 회복과 구원의 역사는 룻기 1장에서 2장으로 3장으로 4장으로 다윗왕으로 그리고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셔서 믿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죽음과 고통을 영원히 멸하려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고통 중에서 여러분의 믿음은 이미 빛나고 있고,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정의의 태양되신 우리 주님의 영광에서 영원무궁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