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 그런뜻이었꾸나] 부활, “인류의 가장 중대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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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인류의 가장 중대한 사건”

부활로 번역되는 희랍어 “아나스타시스,” “엑세게이로,” 그리고 “에게르시스”는 “일으키다”는 기본 의미를 갖습니다. 이 단어들은 문자적으로 “다시 일어서다” 혹은 “깨어나다”를 의미합니다. 호메로스의 저서에서 이 낱말들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에 의학 분야에서 이 낱말들은 병든 자를 회복시키고 심지어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후기 그리스 문학에서는 이 단어들이 영혼의 윤회를 언급하는 데 사용됩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을 언급할 때, 이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인간은 사후에 불멸의 존재로 부활한다는 사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70인역 그리스어 구약성서에서 부활은 죽은 육체의 소생을 의미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린 사건을 묘사하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세번이나 엎드려 맞춘 다음, 아이의 혼이 다시 몸으로 돌아 오도록 기도합니다. 그러자,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면서 그가 살아납니다. 엘리야는 그녀에에 “보라 네 아들이 살아 났느니라”고 알립니다.

   신약성경에서 부활은 두 측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류의 부활로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필멸의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죽음을 이기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그 중대성은 신약 성경에 매우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의 기록대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열 두 제자와 수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자신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토대를 형성하는 주춧돌과 같았습니다. 부활은 초기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기초였습니다. 부활은 예언의 성취였고, 사도들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중심이었으며, 교회 사역의 신성한 능력이 되었고, 또한 교회의 산 소망이었습니다.  

   인류를 위한 부활에는 크게 두 용도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앙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예 (example)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존재가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로서 신세계의 시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한 개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신앙인은 신세계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신앙인이 부활을 통해 진입한 그 곳은 그리스도가 친히 통치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신앙인들은 오늘의 생활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과 능력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위에 있는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으라”고 조언한 것입니다. 그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세속적인 가치보다는 훨씬 차원 높은 삶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낮은 차원의 삶이 아닌 창조주의 기준에 따른 생활입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의 영원한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활에 관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육체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말씀합니다. 이 주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의 기본 주제였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부활의 절대적이고 견고한 확실성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보장된 미래의 부활은 오늘의 아픔을 이기는 소망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바울은 휴거 사건을 언급하면서 부활이 우리에게 희망인 사실을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하신 말씀이 진리임을 믿게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와 연합한 우리도 장차 부활하게 되리라는 확신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동행하십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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