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다른 대안을 찾지 말라사무엘상 8:1-9김치길 목사 (토론토 빌라델비아교회)

다른 대안을 찾지 말라_사무엘상 8:1-9

김치길 목사 (토론토 빌라델비아교회)

[연속적인 인생의 문제]

우리의 삶에는 날마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집니다. 때로는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터지기도 합니다. 마치 문제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마음이 불안합니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염려를 잊을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가기도 하고, 세상 많은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일시적입니다.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잠시 위안을 줄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전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때로는 고통이 더 커지기도 합니다.현실의 문제를 잊으려고 여행을 가지만, 돌아올 때에는 이전보다 더 초췌해집니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시 문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계속되는 여러 문제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에는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대안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요구] 

본문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안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세운 두 아들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와 왕을 요구하게 됩니다. 장로들이 왕을 요구한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사무엘상 8:5) 

장로들과 백성들은 첫째, 사무엘 당신이 늙었고, 두번째, 당신의 아들들이 잘못된 재판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장로들의 요청은 정당한 것 같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는 사사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 제도는 신정 정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사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이지만, 사사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중보자였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8:2에 보면, 사무엘의 두 아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사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남쪽은 작은 성읍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무엘의 늙음과 두 아들의 악함은 이스라엘에 왕이 필요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고, 단지 핑계거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사무엘의 두 아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정말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처했다면, 사무엘상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함께 기도한 것처럼, 이번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장로들의 속 마음]  

그렇다면, 장로들이 왕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진짜 속마음은 삼상 8:5b하반절에 드러납니다. “…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사무엘상 8:5하) 

당시 주변 나라들은 대부분 왕정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군대가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상비군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필요할 때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다른 이방 나라들의 강력한 상비군으로서의 군대가 부러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강력한 왕, 권세있는 사람의 보호 아래 있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과 사명을 이제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결정인 것입니다. 

[기뻐 않는 사무엘] 

당연히 사무엘은 장로들의 생각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과 백성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장로들의 요구를 알리고 하나님께 모든 결정을 맡겨드립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사무엘상 8:7)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아픈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사무엘아,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 백성들이 나 여호와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왕으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픈 마음을 사무엘에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포기해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염려하시면서 마지막까지 경고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왕정의 위험]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이 세워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사무엘상8:10-17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아들들은 왕의 군사로 징집당하고 전쟁에 나가게 됩니다. 왕을 위해 말과 병거를 몰아야 합니다. 딸들은 왕의 시녀가 되고, 왕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왕은 백성들의 밭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으며, 취한 것을 왕의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자연스럽게 계급 제도가 생기게 됩니다. 

또 왕은 백성들에게 십일조와 세금을 거두어, 자기 신하들에게 주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백성들은 왕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종으로 모두가 평등한 형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백성들이 왕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왕이 세워질 때 이러한 일들이 있다고 백성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경고를 주시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세상의 권세 vs. 하나님의 거룩]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나라”를 포기하고, 세상적인 권세를 지닌 사람이 다스리는 ‘강한 나라’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경고합니다. 이 땅, 세상에서 보여지는 강한 권세, 물질, 명예, 그런 것을 가진 ‘강한,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 순간 순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인가? 세상은 끊임 없이 우리를 향해 유혹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강함에 관심을 갖고, 부러워하는 순간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비극의 시작]

하나님과 관게 없는 사람은 그 삶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인류 비극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류에 비극과 저주가 들어 왔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본래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목적]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첫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가장 인간다워집니다. 예배를 놓치면 삶의 의미도, 가치도, 목적도 잃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예배가 무너진 것입니다. 인류의 비극은 예배의 실패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배가 인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구원을 통해 무엇이 회복됩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원 받은 신자에게 예배 보다 더 강조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없다면 모든 일의 중심은 인간이 됩니다. 예배가 없다면 어떤 일이든 인간을 위한 일이 되고, 인간에 의한 일이 되고, 인간의 일이 됩니다. 

[예배의 중요성]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 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만약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예배의 삶에는 늘 유혹이 존재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아픔을 드려다 보면 핵심은 예배의 실패의 반복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에게서 고개를 돌려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하나님에게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상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결국 우상과의 그릇된 친밀감을 좇게 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대신 왕을 구하고 있습니다. 본질은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1-2)

하나님이 인류에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한 사람을 불러내는데 그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약속한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복을 그냥 구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약속하는 하나님께서 먼저 이야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입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익숙한 환경, 익숙한 문화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그 환경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4)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떠남으로 끝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지만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간 게 아니라 그의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롯의 기준은 삼촌이었습니다. 사람을 따라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대안을 찾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떠날 뿐만 아니라 떠난 그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것입니다. 떠나기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 자신을 이끌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이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나 자신을 끌고 가야 합니다. 

[다원주의]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다원주의가 더욱 강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명확한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다원주의에서는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여럿 중에 선택하라고 부추깁니다. 다원주의에서는 ‘유일’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길이 여러 갈래 있으므로 좋은대로 선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결코 믿음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사시대의 모습이 이미 다원주의에 깊게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진리 vs. 편리]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기준을 싫어합니다. 기준을 거추장스럽게 여깁니다. 그냥 적당히 편리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느낌에 충실하게 반응하기를 원합니다. 진리 보다 편리를 더욱 선호하는 세상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곳에는 기준이 점점 더 낮아집니다. 기준이 한 없이 낮아지다 결국 기준 자체가 없어지게 됩니다. 모두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자기가 좋을대로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남자든, 여자든 다른 사람 눈치보지 말고, 생물학적 몸도 상관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이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점점 더 경멸하는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으로 여기는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곧,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강요하지 말라는 것을 자유민주사회에서도 법제화하며 막을 날이 곧 올지도 모릅니다. 

[가나안 족속 진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당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족속에 대한 진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타락한 문화에 순응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말씀은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화 오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하면 세상 문화에 대한 경계태세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는 물이나 공기와 같이 나도 모르게 먹고 마시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는 오염도가 너무 높습니다. 

플라스틱 같은 환경 쓰레기들이 바다에 거대한 섬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하아이 사이에 위치한 “Great Pacific Garbage Patch”라고 불리는 이 “쓰레기 섬”의 크기는 160만 제곱킬로미터인데, 그 크기가 한반도의 약 7배라고 합니다. 분해된 플라스틱을 물고기들이 먹고, 그것은 인간이 먹음으로 이미 심각한 질병들을 유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환경 오염의 영향을 받으며 살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환경오염들로 인해, 기후, 날씨가 얼마나 급격하게 변했는지 우리는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환경 오염보다 더 심각한 것이 바로 문화적 오염입니다. 세상의 문화 안에 수 많은 거짓 메시지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상의 문화의 공격들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우리 자녀들을 ‘포용’이라는 가면으로 잘못된 문화에 수긍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세상의 문화에 물들게 됩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세상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지금도 세상과 타협하라는 부추김에 계속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속의 힘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사 시대와 이 시대의 문화적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에게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예배는 한 분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갈수록 강력해지는 세속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과 풍조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문화의 흐름에 단호한 태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중심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배를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더욱 깊은 예배의 회복을 경험하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입니다. 시편 119편105절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등’은 발 앞을 밝혀주는 것이고 ‘빛’은 전체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등’과 ‘빛’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가 거하는 곳이 ‘어두운 곳’이라는 의미합니다. 시인은 우리 인생의 모든 걸음 걸음이 어둠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빛 되신 말씀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매일 ‘등’이 필요하고, 우리의 인생에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등이 없으면 우리는 매일 헤매일 것이고, 빛이 없으면 그 인생은 벼랑 끝입니다. 말씀을 어느 정도 사모하고 계십니까? 그 말씀을 사모하는 그것이 내 인생의 수준입니다.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고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원주의 시대에 절대적 기준,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절대적 기준을 붙잡고 믿음으로 달려가면 그 말씀이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대안을 찾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의 해답이 되십니다. 오직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의 지혜입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주님, 지금까지 세상의 강함을 위해 달려왔던 저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세상에서, 사람에게서, 물질에서 대안을 찾으려 했던 죄를 회개합니다. 내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옵소서. 주님의 능력보다 물질의 능력를 더 사모하고, 주님의 도우심보다 권세 있는 사람의 도움을 더 사모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주님의 보호하심보다도 돈의 보호가 주님의 형통하심보다 지인과 지인이나 권력을 통한 형통함을 우리 역시 더 사모했음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삶의 부족한 부분, 채워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의 임재를 사모 하며, 예배의 영광을 더욱 구하며 주의 다스림을 즐거이 누리는 삶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말씀이 강해 보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욱 강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길 결단합니다, 

우리의 삶에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공간을 사람의 생각과 세상의 권세로 채우려는 어리석은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빈 공간을 남겨두기보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사람과 상황을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열방과 같아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안을 찾지 않기를 결단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더욱 뜨겁게 예배하며, 더욱 깊이 말씀에 잠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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