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_요20:19
새하늘교회 권혁근 목사
평안이 필요한 인생
부활하신 이후에 마침내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그 때 제자들은 문을 잠그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자들을 보자마자 하신 첫번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다.
우리의 삶에는 평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밀턴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실낙원”이다. 낙원을 잃어버린 세상이다. 그 속에는 참된 평강이 없다.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에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지휘관들이 “큰 대과 없이” 마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큰 허물이나 잘못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군대에서 온갖 일들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큰 일이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비단 군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런 말들도 많이 한다. “평범하게만 살고 싶은데 어렵네!!” 어떤 어려움이나 근심된 일이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은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평안이 늘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대체로 평안을 세상에서 얻으려고 한다. 사실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남들보다 돈이 조금 더 많고, 공부도 조금 더 잘하고, 좋은 직장을 다니면 어느 정도의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평안은 오래가지 못한다. 돈이 있다가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진다. 도리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잃어버릴까 거기에 매이게 된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금의 유익은 있지만 참된 평강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평안이 필요한 우리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평안은 특별하다. 요14:2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을 주신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일시적이지 않다. 우리를 얽매는 평안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평안이다.
우리는 평안이 필요하고 주님이 평안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평안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간단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주님이 주신다고 하셨는데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세상과 다른 그 풍성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도리어 성도들도 세상이 주는 평안을 갈구한다. 많은 기도 제목을 보면 주님을 통해 세상이 주는 평안을 추구한다. 주님에게서 세상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평안을 갈망하는 우리는 왜 평안을 누리지 못할까? 그것은 주님의 평안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방편을 통해 평안을 주시는 지 알아야 한다. 오늘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평안을 주시는 그 방법을 알아보자!
제자들의 근심과 주님의 평안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제자들의 걱정과 근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13장에서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 휩싸인다. 주님이 떠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나름 모든 것을 버렸다. 직업도 뒤로하고, 가족도 뒤로 하고 주님을 따랐다. 주님께 자신의 일생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떠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길을 제자들이 따라올 수도 없다고 하신다. 제자들은 당황했고 근심과 걱정에 빠지고 말았다. 멘붕에 빠진 것이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신다. 요14: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주님은 근심하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셨다. 내가 너희의 근심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2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하셨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1,2절을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2절을 ‘천국 어딘가에 집을 지으러 가시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천국에 집을 지으러가는 것이 먼 미래를 생각할 때 작은 위로가 될 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의 근심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천국에 대한 오해가 1,2절에 대한 그릇된 해석을 낳은 것이다.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말씀을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하는 것이 흐름상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거처를 예비하러간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는가?
요14:2절에 나오는 단어 ‘거처’의 헬라어는 ‘모네’이다. ‘모네’는 신약성경에 딱 두 번만 나옵니다. 바로14장에서만 두 번 사용된다. 한번이 여기 2절이라면, 다른 한 번은 바로 4:23절이다. 이 두 구절이 연결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같은 단어가 같은 문맥과 흐름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요4: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쳐는 죽어서 가는 천국의 집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처는 바로 사람이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사람을 ‘거처’로 삼아 임하겠다는 말씀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 바로 제자들과 성도들을 가리킨다. 주님을 참되게 믿는 제자와 신자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임하여 함께 하신다. 이것이 바로 ‘거처’의 의미이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답은 ‘내가 천국에 너희들의 집을 짓고 기다릴 테니까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잘 버텨! 나를 떠올려!’가 아니다. ‘지금 천국을 생각하며 살면 너희들은 근심하지 않고 평안을 얻을꺼야!’가 아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은 응답은 ‘내가 아버지와 함께 다시 너에게 와서 너와 함께 살겠다’는 말이다.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 내가 가야 한다는 말이다. 죽고 부활하셔야 주님은 제자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다.
동시에 여기서 함께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요14:16절에 “내가 어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 성령 하나님이 제자와 신자속에서 역사하신다.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역사하신다. 그는 ‘진리의 영’(17절)이시다. 그 분은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진리 안에서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신다. 요14:18절 주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며 약속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20 에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제 명확해졌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내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말이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제자들은 근심을 잊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주님과 함께함에서 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 때, 삶 속에서 주님의 동행하심을 깨달을 때에 평안이 임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좌중우돌했지만 그들이 나름 평안했던 이유는 주님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주님이 떠나신다고 하니 불안해진 것이다. 지금 주님이 하시는 일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평안의 길을 여시는 것이다.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토록 함께 하는 길을 개척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평안이 ‘주님과 하나됨’ 혹 ‘주님의 함께 하심’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과 차이가 난다. 주님의 평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평안이다.
하나님아버지 안에서 누리는 주님의 평안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평안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평안을 닮았다는 것이다. 요16:32-33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주님이 떠나심으로 당황스러워하지만, 진짜 혼자가 되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시다. 누가 봐도 주님 옆에 사람이 없다. 제자들도 흩어지고 여인들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 제자들이 보기에,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도 주님은 ‘혼자’가 되시는 길로 나아가신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느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하시는 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이다. 이 신비로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뒤에 덧붙이는 말씀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주님은 아버지 안에서 평안을 누리신다는 것이다. 십자가 내내 주님은 혼자가 아니셨다. 아버지 하나님이 주님과 함께 하셨다. 주님은 결코 혼자가 되신 적이 없으시다. 주님은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도 평안을 누리셨다. 동시에 우리도 주님 안에서 이와 같이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인 것처럼 보이고 때로 아무도 없을 때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 때, 주님의 함께 하심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처럼 평강을 얻을 수 있다.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오늘 떠났던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나타나셔서 평안을 전하신다. 그 속에는 이제 다시는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선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주님은 제자들의 눈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제자들 안으로 더 깊이 성령님과 함께 거하신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신비이며, 평안의 신비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신비의 비밀이다. 주님은 우리와 깊이 하나가 되심으로 우리에게 평안을 약속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평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은 ‘나는 평안 할 것이다!’와 같은 최면이나 암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인식하고 바라보면 평안이 임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님을 시선에서 놓쳐 당황하며 울던 아이가 부모님이 자신의 시선안에 나타나는 순간 평안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삶 속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은 무엇보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더 멀리 할 수 없을 만큼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주님과 만나 대화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글자로 쓰여진 말씀은 단순한 글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은혜의 통로, 성례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까지 이르십시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십니다.
예배에 더 마음을 쏟으십시오. 예배는 온 몸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공간입니다. 찬양할 때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몸과 마음은 함께 움직입니다. 예배의 방관자, 예배의 참관자, 시청자가 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성찬에 집중하십시오. 성찬은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되는 영적 상상을 하십시오. 주님이 나와 깊이 하나되는 것을 갈망하며 성찬에 참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이 체험될 것입니다.
평안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함께 하심, 동행 속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평안을 누렸습니다. 부활하여 새롭게 찾아오신 주님을 제자들은 계속해서 체험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동행합시다. 그 평안을 영원토록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