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성숙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_데살로니가전서 2:13~3:5_나나이모은혜교회 조용완 목사    

성숙은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_데살로니가전서 2:13~3:5                                                    

나나이모은혜교회 조용완 목사

저는 나이가 들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꼰대가 아닌, 지혜롭게 성숙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숙은 시간이 흐른다고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숙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대가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의 공동체가 어떻게 성숙해갈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사이에서 일어난 여러 일을 적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그들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몇가지 계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의 설교가 아니라 그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디모데를 보냈을 때에도, 그들은 디모데의 설교가 아니라 디모데의 설교를 통해 각자에게, 공동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성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보내면서 우리는 유튜브나 온라인을 통해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많은 사람들은 누구의 설교인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인지, 내 성품, 기질, 지적수준에 맞게 설교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각자 취향에 맞는 설교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더 뚜렸해졌습니다. 이러한 증상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듣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누구의 설교든 상관없이 사람을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결과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이 자기 속에서 일하는 것을 경험하며 변화합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 취향에 맞는 설교를 듣고 감탄하고 기뻐하고 은혜받았다고 좋아하지만 그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 인격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즐겁게 설교를 듣지만 예배당을 빠져나가면 잊혀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없이 성숙해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다양한 양육과 훈련을 받고 기도하고 봉사와 사역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숙해지기보다 지치고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고, 크고, 높은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꾸준히 깨닫고 알아갈 때, 우리는 성숙하게 자라게 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성숙하게 될 수 있었던 점은 그들이 고난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유대에 있는 교회, 즉 예루살렘교회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수천명이 주님께 돌아온 부흥의 사건, 모든 것을 나누며 섬겼던 이웃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기억하는 예루살렘교회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인내한 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고난이 왔을 때, 피하거나 도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며 견디고 이겨낸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서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겠습니까?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받고 복음적인 삶을 살고자 하면 고난을 피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으려 한다면, 많은 고난과 어려움도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처럼 살기보다 고난을 피하고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산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3~4에서 환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숙하게 자란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성숙할 수 있었던 계기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과 성도들이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17~18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것은 새로운 사역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것은, 갓 태어난 아이를 둔 엄마가 뜻하지 않는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아기와 떨어지게 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으로 갓 태어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여러 차례 돌아가려고 했으나 사탄의 방해로 가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엄마의 돌봄이 절실한 것처럼, 영적으로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영적인 부모인 바울의 도움이 정말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그 길을 막아서 가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볼 부모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정말 필요한 때에 영적인 부모인 바울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 때문이 아니라 사탄이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탄이 막은 것을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도 위대한 사도인 바울도 사탄에게 지고 만 것입니다. 바울이 사탄의 방해에 막혀 어린 성도들을 돌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방해로 막혀있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영적인 부모인 바울도 사탄에게 져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영적으로 어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적인 고아처럼 흩어지고 무너졌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부모인 바울과 헤어지는 고통을 통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성숙해지는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울의 사역없이도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고아처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위대한 바울은 사탄에 의해 막혔지만,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문맥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사탄에 의해 막혔다고 말하면서도 좌절하고 낙심하는 분위기를 찾아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바울 자신도 사도로서 더 성숙하게 자라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개척했지만, 내가 양육했지만, 내가 영적인 부모지만, 내가 없다고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는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시고 자라게 하시는구나!” “그들에겐 나보다 하나님이 더 필요하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자라게 하는구나!”

제가 첫번째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했을 때 일입니다. 목회자 위주의 교회가 아니라 성도중심의 건강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목회했었습니다. 제대로된 휴가도 없이 쉬지 않고 성도들을 돌보며 목회하다 보니 교회는 점점 부흥하였고, 예수 믿고 회심하는 분들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점점 성장하면 할수록 교회는 익숙한대로 목회자 중심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아버지인 저를 더 주목하였고 제가 모든 것을 해주기를 바라보며 저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제가 꿈꿔왔던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몇개월을 기도하며 고민하며 연구하면서 ‘팀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이라고 가르치고 목사에게 묻지 말고, 각 팀에서 기도하고 의논하고 계획하고 시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배와 성경공부를 제외한 모든 사역에서 일부러 거리를 두었습니다. 성도들이 목사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자라나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 몇 년 동안은 실수도 많고,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3~5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팀사역이 어느 정도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목사를 덜 찾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사역적인 부분에는 목사가 없어도 괜찮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목사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가깝고 중요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것처럼 우리의 공동체에도 우리를 부모처럼 이끌어주던 목회자나 리더, 너무 귀하게 섬겨주던 성도들과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잘 헤어져도 아쉬움과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데 어떤 때는 갑작스러운 상황때문에 헤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이끌어주고 인도해주고 힘이 되어 주고 도움을 주었던 분들과 헤어질 때가 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실까요? 무너지고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 성숙하게 자라길 바라십니다.

어찌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성숙하게 자라게 된 것은 바울이 짧은 기간 사역하고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세에서 벗어나 더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헤어짐의 아픔도 있었으나 아픈 헤어짐을 통해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성숙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과 헤어질 때, 나에게 힘과 위로,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 떠날 때, 내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었던 사람이 떠날 그때야말로 주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우리가 읽고 들은 하나님 말씀을 의지할 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경험할 때입니다. 사람의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연약해진 우리 속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성숙하게 자라게 됩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로 갈수 없게 되자, 대신 디모데를 보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돕게 합니다. 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여기서 놀라운 점은 바울이 디모데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통해 예수를 믿었고, 바울에겐 아들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또한 디모데를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저 같으면 디모데를 ‘내가 키운 아들같은 제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지만 조금이나다 도움이 되는 사역자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영적인 아들같은 디모데를 주안에서 형제이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꾼으로 대하는 태도는 우리도 배워야 할 점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릴 수 있습니다. 나보다 성경지식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경험이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 형제로 대하고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로 대하는 모습이 진정 성숙한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성숙할 수록 함께하는 사람을 형제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여깁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을 섬기면서 성숙하게 자라도록 돕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내 맘처럼 성숙하게 자라지 못할 때도 있고 마음과 정성을 다했다가 상처받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양육했으나 믿음이 흔들리며 그동안의 수고를 헛되게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성숙하게 하는 일을 더욱 어렵습니다. 바울은 낙심치 않고 어떻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그 비결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소망이나 기쁨, 자랑은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과 출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자랑과 기쁨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영적으로 잘 자라서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성숙하게 자라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고 자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로마시민권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이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라서 대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성도들이 복음으로 회심하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며 영적으로 자라나 성숙해지는 모습에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사탄은 40일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찾아가 시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려 가서 천하 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사탄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영원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단 한번만 사탄에게 엎드리면, 모든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랑하는 부와 명예와 권력과 힘과 영광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좋아하고 그것을 가지고자 인생을 바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시험 앞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마태복음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모든 재산과 명예와 학위와 권세, 힘을 포기하기로 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주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 부와 명예와 권력과 힘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닌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그 무엇도 기쁨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우리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면류관은 무엇일까요? 재산, 학위, 직위, 명예, 권세, 힘, 교회 규모, 성도 숫자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자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겁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 복음으로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가 복음으로 살렸던 사람들, 그들이 우리의 면류관입니다. 고난 중에 분투하는 형제자매들을 굳세게 하고, 격려하고, 하나님나라 공동체로 자라고 세워지는 그들이 우리의 면류관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공동체가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목회자, 우리 성도들이 가장 귀한 자랑되길 소망합니다. 나 혼자 잘 살라고 속삭이는 세상에서 옆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고난을 짊어지고 함께 성숙하게 자라나는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서로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공동체로 세워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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