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믿음” (요11장 28-44절)
몬트리올 새생명장로교회 정성호 목사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행복의 조건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다.” “건강하면 행복할 것이다.”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다.” 물론 돈, 건강, 성공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80년 넘게 사람들의 삶을 추적 조사한 연구가 있습니다. 이 연구는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조사한 세계에서 가장 긴 연구중에 하나입니다.
연구를 이끌었던 하버드 의대 로버트 월딩거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관계이다.” 돈이 많다고해서 지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에서도 그런 모습을 봅니다.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늘 불안하고 공허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환경은 어렵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고, 깊은 신뢰관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분들은 오히려 행복을 느끼더라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 행복은 단순히 환경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이 들 때일 것입니다. 그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관계가 좋을 때는 어떤 환경에 있어도 그 어디나 천국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쉽게 절망에 빠지고 고통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바로 그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행복했던 가정에 깊은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본문 21절에서 마르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또한 요한복음 11장 32절에서 마리아도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그들은 예수님만 계셨으면 오빠는 다시 살 수 있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지 4일이 지난 오빠는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가능성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아직 오빠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더라면 오빠는 분명히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서 죽었다는 섭섭함도 그 말속에 묻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옆에 계시지만, 그들은 마치 예수님이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이제 더 이상 오빠는 살아날 수 없다는 확신으로 인해 예수님이 오셔도 그들은 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슬피우는지,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33절에서 말씀합니다.
여기서 “비통히 여기시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마음이 조금 슬픈 정도가 아니라 깊은 감정의 아픔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마리아의 슬픔을 보시고 그 고통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단순히 한 사람의 장례를 보고 우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죽음의 비극,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의 현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문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첫번째 교훈은 믿음은 막막한 현실속에서도 끝까지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 39절에서 마르다는 무덤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당시 유대인의 장례법에 굴을 파고 그 안에 무덤을 만들어 그 무덤 입구를 돌로 막습니다.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돌을 막습니다. 또는 바위에 구멍을 파서 그 안에 시신을 두고 돌로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와서 그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옮기라고 하면 옮기면 되는데, 마르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말합니다.
“예수님 지금 오빠가 죽은지 나흘째가 돼서 지금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데요.”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말입니다. 당시 유대 장례 문화에서 4일이 지나면 완전히 죽은 상태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마르다의 말은 상식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여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을 직접 경험하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전히 끝난 상황인데, 하나님이 길을 여시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아 하나님이 일하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본 것은 죽은 시체였지만, 믿음으로 돌을 옮겼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게 되지요. 즉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네가 믿으면 입니다.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어둠이 아주 크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해가 떠오르면 어떻게 됩니까? 어둠이 사라집니다. 어둠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빛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는 크지만 하나님은 더 크십니다.” “상황은 어렵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골리앗이 작았던 것이 아닙니다. 매우 거대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골리앗을 두려워했지만 다윗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현실만 보면 절망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보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믿고, 바라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축복이 다가오고,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 자꾸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갖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얻는 것은 일상적인 믿음입니다. 그것은 ‘내가 기차를 타면 목적지까지 날 데려다 줄 것이다’라는 일상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이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던 그 믿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랬습니다. 믿고 기다렸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까? 어려운 상황입니까? 막막한 현실입니까? 아니면 그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 마리아는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를 합니다. “살이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요.” 옮기라고 하면 옮기면 되는 것이지. 우리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요한복음 11장 41절에, 돌을 옮겨놓으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불신앙의 돌을 먼저 옮겨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돌을 먼저 옮겨놓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의 돌을 먼저 옮겨야 합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끝났다. 죽고 싶다.’ 이런 생각의 모든 잘못된 모습의 돌들을 먼저 옮겨야 합니다. 의심의 돌, 고집과 교만과 불순종의 돌을 먼저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볼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도 마음에 의심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있는 두려움의 돌을 옮기고 믿음의 눈으로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실 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실 수 있게 되실 겁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배워야 할 두번째 교훈은 믿음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기도하십니다. 본문 41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놀라운 것은 아직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감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문제가 해결된 뒤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절망 적인 상황에서도, 문제를 만났어도,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이 다가와도 우리에겐 감사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시편 50편 14,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에게 감사의 고백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순간은 당연한 것을 감사할 때가 아닙니다. 도저히 감사할수 없는 순간, 아무것도 내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순간, 그럼에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그 때가 바로 감사의 고백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일임을 잘 압니다.
목회자인 저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정말 도저히 감사할수 없는 상황에 많이 놓여봤는데, 제 이성으로는 도저히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불평과 원망이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요, 그럼에도 감사하라고 하셨으니까 기도하면서 마음은 너무 힘든데 입술은 감사드린다고 억지로라도 자꾸 되뇌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꾸 고백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만지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상황속에 일하실 하나님의 능력이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억지로 시작했던 감사가 진정한 감사로 바뀌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혹, 도저히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입술만으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떤 것이 이루어질 것을 위해 기도하시잖아요. 그 때도 이미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상상하시면서, 감사로 선포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공부 잘 하기를 위해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공부 열심히 잘하고 있는 자녀의 모습을 상상하시면서, 이루어졌다고 믿고 감사로 기도해 보십시오.
병든 분이 있다면, 이미 나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하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이미 치료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누군가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어려움 가운데 있다면, 그 분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정말 친형제, 친자매처럼 친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을 상상하면서, 이미 이뤄진 것처럼 감사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여러분,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행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감사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혹시 지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 계십니까? 힘들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 이미 나를 위해 행하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고백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만지시고 절망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세번째 교훈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은 삶도 살아난다는 겁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외치십니다. 본문 43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이 음성은 단순히 나사로 한 사람을 향한 음성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여러분, 이 음성을 들어야 살아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절망에 처한 자들아 주님께 나오라. 슬픔에 처한 자들아 주님께 나오라. 죽고 싶어서 이대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자들아, 주님께 나오라.
여러분, 세상의 부정적인 생각, 저주받은 생각, 실패의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오늘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는 음성을 듣고,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문제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 듣고 일어나 나오는 순간이 바로 축복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음성은 언제 들립니까?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기도할 때이지요.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기도할 때, 주님의 음성이 강렬하게 나를 향해 나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음성이 들릴 때, 과감하게 나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자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옵니다. 44절입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사로가 나오는데요. 베를 칭칭 감고 쭈뼛쭈뼛 나오는 거예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는데도 온 몸을 칭칭 베로 감은 나사로처럼 문제를 감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의식의 베를 칭칭 감고 살아요. 그래서 늘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럼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마음이 어두워요.
‘나는 실패한 과거가 있습니다. 상처 입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에 칭칭 감겨 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불우하게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마음의 아픔이 있어요. 그래서 아픔의 베를 칭칭 감고 있습니다.
‘그 시험이 뭐라고, 시험에 떨어졌던 실패의 경험’ 때문에 그것을 칭칭 감고 있어요. ‘나는 시집와서 시어머니에게 너무 구박을 받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천국간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를 칭칭 감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가난과 저주의 베도 감고 있고, 질병의 베도 감고 있고, 우리가 이 모든 베를 풀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오늘 모든 결박을 풀어 놓아라. 예수 믿고 나서 지금까지 너를 붙들어 매고 있는 모든 결박을 풀어버려라. · 가난과 저주와 질병과 죄의식과 과거의 상처와 염려와 근심 걱정의 결박을 풀어버려라.”
무엇이 여러분을 묶고 있던지 간에 이 시간에 풀어 버리시고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저와 여러분은 죽음에서 구원받아 새생명을 얻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과거의 쓴 뿌리들이 우리를 칭칭 감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만큼 불행한 일이 없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를 칭칭 감고 있는 이 과거의 결박을 풀 수 있을까요?
여러분, 선포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의 속박을 풀어주셨는데, 우리 스스로 그 속박을 칭칭 감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선포하십시오. 나를 묶고 있는 죄의식, 실패, 상처, 아픔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풀릴 지어다.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하는 선포에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하시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때마다 선포하십시오.
이미 우리는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이긴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할 때, 예수님도 들으시고, 사탄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포할 때, 예수의 영인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여러분,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살리는 영입니다. 생명의 영입니다.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고,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치료함이 있고,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용서함이 있고,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복음 증거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이 우리를 묶고 있습니까? 과거입니까? 상처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나오라.”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선포십시오. “주님,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결박에서 이제 자유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11장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믿음이란 현실보다 하나님을 크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죽은 것 같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혹시 지금 마음속에 무덤 같은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11장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이 음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를 묶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우리를 묶고 있는 과거의 결박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끊고, 믿음으로 일어나 주님께 나아가십시다. 그 때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믿음으로 절망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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