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수를 마신 자의 감출 수 없는 기쁨 : 물동이를 버려두고_요 4:28-30, 39-42
키치너워터루 드림교회 신동희 목사
인사
할렐루야! 어느덧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는 8월의 첫 주일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오늘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드림교회 가족 한 분 한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아름답도다 복음을 들고 걸어가는 발이여!”라는 말씀을 통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 부름받은 우리의 사명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복음을 경험한 사람, 참된 생수를 맛본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세상의 손가락질과 편견 속에서 숨어 지내던 한 사마리아 여인의 눈부신 변화를 통해 그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서론 : 상처와 편견의 그늘에 가려진 영혼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사마리아라는 지역과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을 알아야 합니다.
사마리아는 원래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후(주전 722년),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고 앗수르의 이주 정책에 의해 이방 민족들이 그 땅에 이주해 오면서 서로 통혼하게 되었습니다(왕하 17장). 그 결과 순수한 혈통과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순수하지 않은 민족”, “신앙도 혼합된 사람들”로 여기며 멸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단순한 민족감정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워 예배했고, 자신들만의 신앙 전통을 지켜 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단처럼 취급했고, 서로 왕래조차 꺼렸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지만, 일부러 요단강 동편으로 크게 우회하여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지리적으로만 보면 ‘지나가셨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통과하여야 했다’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녀는 더욱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당시 여성들은 아침이나 해 질 무렵, 시원한 시간에 여러 사람과 함께 물을 길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정오에 혼자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녀의 도덕성을 비난하기 위한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복잡한 삶의 상처와 관계의 실패를 겪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남편들과의 사별, 이혼, 버림받음 등 구체적인 이유는 본문이 말하지 않기에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혼자 살아가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하려 했고,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사람을 피해도 예수님은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과거를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죄인이라 불렀지만, 예수님은 생수를 마실 하나님의 자녀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만남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피해 숨어 살던 여인이 어떻게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무엇이 그녀를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수치에서 기쁨으로 바꾸어 놓았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비밀을 세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본론
물동이를 버려두고 – 세상의 짐과 수치를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
본문 28절은 사마리아 여인의 놀라운 변화를 아주 짧지만 강렬하게 기록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여러분, 이 말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인이 사람들에게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먼저 ‘물동이를 버려두었다’라는 것입니다. 이 물동이는 단순히 물을 담는 그릇이 아닙니다. 여인이 매일 들고 다니던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반복해서 우물을 찾았던 일상, 그리고 생수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의 것으로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 했던 이전의 삶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 물동이에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정오의 뜨거운 햇볕 아래 홀로 우물을 찾아와야 했던 그녀의 상처와 수치, 죄책감, 그리고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살아온 삶의 무게도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는 그 물동이를 아무 미련 없이 내려놓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우물의 물보다 더 귀한 영원한 생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과거를 들추어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가장 깊은 상처를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받아 주셨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인은 그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진정한 용납과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물동이가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물을 길으러 왔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돌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잠시 뒤 돌아온 제자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드시라고 권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여전히 육신의 필요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 4:3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여인은 물동이를 내려놓았고, 예수님은 음식보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이 두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육신의 필요보다 영혼의 생명이 더 중요하며, 참된 생명을 만난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물동이를 억지로 빼앗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맛보게 하심으로, 이전에는 생명처럼 붙들고 있던 그 물동이를 기꺼이 내려놓게 하십니다. 복음은 우리의 과거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에, 쇳덩이처럼 무겁게 짓누르던 세상의 욕망과 수치, 죄책감과 헛된 만족을 내려놓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인이 먼저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사람을 먼저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삶을 통해 사명의 길로 이끄십니다.
오늘 우리도 자신을 한번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물동이’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과 사람의 인정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과거의 상처와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체면이나 사람들의 시선, 혹은 ‘나는 안 된다’라는 열등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물동이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진정으로 맛본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것으로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바꾸고, 우선순위를 바꾸며, 결국 우리의 발걸음까지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복음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억지로 전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감출 수 없는 기쁨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말하게 됩니다. 사명이란 의무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감격이 흘러넘쳐 맺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생수를 마신 이 여인은 왜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장 마을로 달려갔을까요?
전도 훈련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누군가 시켜서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수를 마신 사람에게 나타나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의 모습 두 번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와서 보라” – 메시아의 은혜는 사람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변화된 사람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십니다. 물동이를 버려둔 여인은 이제 동네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29절입니다.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참 놀랍습니다. 여인은 “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내 인생이 잘되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말씀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한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한 “내가 행한 모든 일” 속에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가장 아픈 상처였고, 평생 감추고 싶었던 수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을 피해 정오에 혼자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가장 깊은 상처를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죄를 외면하지도 않으셨고, 죄만 바라보며 밀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말씀하시면서도 사랑으로 품으셨고, 영원한 생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알고도 자신을 사랑하시는 메시아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상처를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은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공동체까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한때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 이제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숨어 살던 사람이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고, 부끄러움에 묶여 있던 사람이 기쁨으로 복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은혜가 가진 변혁력입니다. 복음은 가장 소외된 사람을 하나님의 증인으로 세우시는 능력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제 가서 전도하여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생수를 마신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단 한 마디를 외칩니다. “와서 보라” 전도의 시작은 신학이 아닙니다. 전도의 시작은 간증입니다. 여인은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론을 강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입니다”, “내 인생을 아시고도 사랑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한 논리보다 변화된 삶을 더 신뢰합니다. 가족은 우리의 설교보다 우리의 삶을 먼저 봅니다. 직장 동료는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인격을 먼저 봅니다. 그래서 복음을 경험한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전도의 도구는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변화된 삶입니다.
사도들도 행 4:20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정말 만났다면, 우리 역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는 의무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 누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런 여인의 간증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놀랍게도 그녀의 짧은 한마디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와서 보라”
이 초청을 따라 나온 사람들은 이제 여인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도 놀라운 신앙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복음은 한 사람의 간증을 넘어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 “네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들었노라” : 공동체의 변화
사랑하는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의 간증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이틀을 머물며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42절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에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39절과 42절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3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처음에는 여인의 간증 때문에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42절에서는 “이제는 네 말 때문이 아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아름다운 과정입니다.
간증은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여인은 사람들의 믿음의 출발점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믿음의 완성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전도자는 사람을 자기에게 남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연결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예수님께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욱 놀라운 고백이 이어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은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유대인만의 구원자로 기대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민족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세상의 구원자(Savior)라고 부르며 숭배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선언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구주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남자의 구주만이 아니라 여자의 구주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구주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구주이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만이 아니라, 죄인들의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민족과 모든 세대를 위한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보편성입니다. 복음은 민족과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 신분과 계층의 장벽을 허물며, 죄와 수치의 장벽까지 허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변화로 끝나지 않고, 온 마을의 변화로 이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드림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설득하는 뛰어난 언변이 아니라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충실한 안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의 간증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며, 마침내 우리를 넘어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된다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이제는 네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결단 및 적용
사랑하는 드림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이 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홀로 우물을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실패,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치심 속에 살아가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었던 영혼의 갈증을 내려놓고, 영원한 생수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 숨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와서 보라” 결국 그녀의 작은 간증은 온 마을을 예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알았노라” 이것이 복음이 맺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복음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한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끌며, 마침내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드림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님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소외되고 가장 상처가 깊었던 사마리아 여인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한 마을을 살리는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만 사용하지도 않으십니다. 복음의 생수를 마시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혹시 오늘도 여러분 가운데 과거의 상처라는 물동이를 붙들고 계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물동이를 붙들고 계십니까? 성공과 돈, 사람의 인정과 체면이라는 물동이를 붙들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4:14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시간, 우리의 물동이를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로 우리의 영혼을 다시 채우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억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드림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 드림교회는 크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부족한 것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사람을 통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한 마을을 변화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일터를, 우리의 이웃을, 그리고 이 지역을 변화시키실 줄 믿습니다.
이한 주도 생수를 마신 사람답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물동이를 내려놓고, “와서 보라” 외치며,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시는 모든 드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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