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예배, 더러운 마음” 에스겔 8장 강해(겔 8:1~18)
밴쿠버 만나교회 손진웅 목사
한국에서 청년부를 섬기던 시절 리더십 리트릿 장소를 찾던 중 집사님 한 분이 선교사님들이 오시면 편히 쉬시라고 지어 두신 별채가 양평 가는 길목에 있다며, 리더 청년들과 함께 다녀오라고 권하셨습니다. “깨끗하고 시설도 좋으니 가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며 손수 열쇠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기대에 부풀어 그곳으로 향한 것은 6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푸르른 산과 들을 지나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좁은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는 내내 우리는 들떠 있었습니다. 계곡 끝 언덕배기에 이르러, 멀리서부터 노란 벽에 푸른 지붕을 인 별채가 눈에 들어왔을 때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주변 경치와 너무도 잘 어우러진 그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와, 저긴가 봐. 진짜 예쁘다”하며 차 안에서부터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러나 도착해서 마주한 현실은 달랐습니다. 앞마당의 텃밭과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그 정도는 애써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먼지가 켜켜이 쌓인 실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불에는 눅눅한 습기가 배어 있었고, 방 구석구석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화장실 역시 차마 말로 옮기기 어려울 만큼 지저분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 그토록 아름답던 그 집이, 가까이 다가가 문을 열어 보니 이토록 더러웠던 것입니다.
에스겔서 8장은 바로 그런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없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부러워하며 한 번쯤 보고 싶어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 성전을 향해 “가증하다”는 말씀을 다섯 차례나 되풀이하십니다. 너무 더럽고 추악해서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겹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에스겔서 7장까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엄중한 심판을 예언하도록 에스겔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8장부터 11장까지, 그 심판이 어째서 정당한지를 여섯 단계에 걸쳐 하나하나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이유입니다. 장로들 앞에 앉아 있던 에스겔은, 주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 순식간에 예루살렘 성전 뜰로 옮겨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에스겔의 몸은 여전히 바벨론 포로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몸으로는 이미 심판을 따라 끌려간 포로였지만, 영으로는 고향 예루살렘 성전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거리로도 가릴 수 없고 시간으로도 미룰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 마음의 실상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자리, 마땅히 깨끗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목격한 것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더 깊어지는 더러움이었습니다.
에스겔이 처음 마주한 곳은 성전 북쪽 문, 곧 제단으로 이어지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은 왕궁과 가장 가까워 왕들이 예배드리러 올 때 사용하던 문이자,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이 죽임당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시작되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에 “질투의 우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질투케 하는 우상, 곧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과 아세라였습니다. 이 우상들을 섬기는 자리에는 언제나 술과 가무와 성적 타락이 뒤따랐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풍요와 번영과 무병장수를 빌었습니다. 예배가 첫걸음을 떼야 할 그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예배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배의 첫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미 마음 한켠에 하나님보다 먼저 자리 잡은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반드시 형상을 갖춘 우상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자주 찾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하나님보다 더 나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나의 ‘질투의 우상’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어 뜰의 담 앞으로 인도됩니다. 담에 구멍이 있어,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담을 헐고 들어가 보니 더 가관인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사방 벽마다 각종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이 섬기던 온갖 우상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 일흔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었는데, 손에 향로를 들고 있었고 그 향연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향을 피워 왔는지 짐작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야아사냐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반은 열왕기에서 요시야 왕의 우상 척결 개혁을 도왔던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금 우상숭배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전통이 흐르는 집안,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 영향력을 지닌 이들의 자녀라 해서 저절로 신실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장면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신앙의 연조나 맡은 직분이 신실함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온 이들일수록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말씀입니다. 익숙함은 때로 거룩함과 가장 멀어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멀어져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향해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8:12). 하나님이 이미 외면하셨으니, 우리라도 다른 신을 의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항변입니다. 훗날 말라기 선지자 앞에서도 이스라엘은 비슷하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습니까”(말 1:7-8)라며 오히려 되묻고, 훔친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예물로 가져오면서도 “번거롭다”고 코웃음을 칩니다. 예배는 드렸고 헌금도 냈고 맡은 일도 열심히 감당했는데 어째서 내 삶에는 복이 임하지 않느냐고, 결국 다 하나님 탓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입니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예배의 민낯입니다.
오늘 우리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도 드렸고 헌금도 했고 봉사도 했는데 왜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느냐고,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슬며시 돌아서고 있지는 않은지요. 열심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지, 아니면 내가 받을 대가를 향해 있는지는 가만히 살펴보지 않으면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에스겔은 더 안쪽 뜰,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세 번째 장면을 봅니다.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담무스는 바벨론에서 섬기던 풍요의 신으로, 봄에는 식물을 자라게 하고 결실을 맺게 하지만 계절이 바뀌면 시들어 죽는다고 여겨졌습니다. 여인들의 울음은 이 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닥친 기근을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의 죽음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슬픔이나 눈물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애통해하는 눈물은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문제는 무엇을 향해 울고 있느냐입니다. 사라져 가는 우상을 위해 흘리는 눈물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흘리는 눈물은 전혀 다른 눈물입니다.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의 진정한 원천은 하나님이신데도,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바벨론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워야 하는데 바벨론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우리도 크고 작은 어려움 앞에서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 먼저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위로부터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혹은 하나님께 진지하게 물어보기보다 손쉬운 대상에게 돌리고 마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위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보다 언제나 더 빠르고 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이 인도된 곳은 성전 안뜰이었습니다. 이곳은 레위 지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일 년 내내 속죄제와 속건제와 화목제를 드리던 가장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곳,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스물다섯 명이 성전을 등지고 얼굴을 동쪽으로 향한 채 태양에게 절하고 있었습니다. 신명기는 이미 분명히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이 온 세상 만민을 위해 배정해 두신 것일 뿐,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신 4:19). 그러나 이스라엘을 대표해야 할 스물다섯 명이 오히려 그 경고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습니다.
이 스물다섯 명을, 당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던 스물네 반차의 대표들과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예배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 자신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는 뜻이 됩니다. 지도자의 타락은 결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공동체 전체의 타락으로 번져 갑니다.
여기서 치명적인 것은 그들이 “성전을 등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등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을 쫓아가려면 예배를 등지고, 교회를 등지고, 결국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향해 서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굴을 향하고 있는 방향이 곧 우리가 예배하고 있는 대상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성전 가득, 더러운 우상들로 가득 찬 이스라엘의 모습을 목격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겔 8:18)
어떤 부르짖음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이 선언은, 결국 11장 22-23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과 성읍을 떠나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심판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심판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던 그 자리를 스스로 떠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환상이 있은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과 그 화려하던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고 불타 버립니다. 에스겔이 영으로 먼저 본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눈으로 보는 역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이렇게, 언제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먼저 시작되어 보이는 자리로 나타납니다.
이 본문을 읽으며 우리는 삼천 년 전 예루살렘의 이야기로만 흘려보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건물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내가 있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전입니다. 내 마음 안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미움과 욕심과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향기가 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것이 남아 있다면,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에스겔서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은 환상 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겔 11:16).
특별히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가장 낮은 자리, 곧 모든 것을 잃고 포로로 끌려간 그 자리에서 주어졌다는 점이 뜻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장 멀리 흩어진 곳에서조차 성소가 되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실패와 심판 이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낮아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십니다.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11:19~20)
심판을 선언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이 일은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있었기에, 우리 마음의 모든 더러운 우상이 비로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첫째 목적은 우리를 일꾼으로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배자로 삼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 이후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일들은, 언제나 예배를 지극히 사모하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사람이 주를 위해 일할 때 그 사역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지만, 예배하지 않고 그저 일만 하는 사람의 수고는 결국 불에 타 없어질 뿐입니다.
이것은 봉사와 수고를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서의 문제입니다. 예배가 사역보다 뒤로 밀리면, 우리의 수고는 쉽게 지치고 억울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먼저 제자리를 잡으면, 같은 수고도 감사와 기쁨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너무나 깊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바르게 생각하려 애쓰고, 하나님이 내 생각 안에 거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입니다. 삶의 어느 자리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으려 애쓰고, 한 걸음 내디딜 작은 땅까지도 거룩하게 드리려 할 때, 우리의 모든 시간과 장소가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성소가 되고, 세상 속 여러 활동에 분주한 순간에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예배의 제단이 됩니다.
신앙이 있든 없든,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마음 깊이 아끼고 의지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를 채워 주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우리 마음을 먼지와 곰팡이로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한 번쯤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여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별채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2박 3일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주한 상황은 한 시간도 머물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시작 예정된 일정 대부분을 접고, 도착하자마자 청소부터 했습니다. 기쁨이랄 것은 없었고, 오히려 그곳을 소개해 주신 분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리더인 제 마음이 그러했으니, 함께 간 청년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 안에서 쉬려면, 그 안에서 예배하려면 치우고 또 치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잘못된 예배로 나아갔던 더러운 마음의 자리를 이제는 청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 영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 청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속마음을, 특별한 날 한 번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되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를 씻으시고 새 마음을 채우시는 분이 성령이시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헛된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 영혼과 마음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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