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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염치없음에 관하여_에스겔 23장 11-18절_다음세대브릿지교회 김영웅 목사

염치 없음에 관하여_에스겔 23장 11~18

다음세대브릿지교회 김영웅 목사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았다. 유명한 감독답게 원전의 중요한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와닿은 대목은 세이렌의 유혹 장면이었다. 주인공은 자신이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도 살아남은 최초의 인물이 되겠다고 자신했고, 결과적으로 유혹을 견디며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세이렌이 그의 가장 깊은 본심을 찔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더 떠돌며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는 진실을 들추어냈고, 오디세우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통해 자신이 트로이에서 행한 일은 찬란한 승리의 영웅담이 아니라, 공명심에 눈이 멀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한 야만적 폭력에 불과했다는 뼈아픈 자각에 이른다. 그토록 갈망했던 전쟁의 승리가 실상은 문명인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가장 파렴치하고 혐오스러운 행동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뼈아픈 자각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과정이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에스겔 23:5–6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들과 사령관들이요 준수한 청년들이며 말 타는 기병들이라”

에스겔 23:14–16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그 허리는 띠로 묶었고 머리는 긴 수건으로 감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그가 보고 곧 눈이 맞아 사절을 갈대아로 그들에게 보내매”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들의 염치없는 태도 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번영을 마다하고 세상의 힘으로 세워진 세상의 번영을 더 부러워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자로 염치는  廉 (청렴할 염)  恥 (부끄러워할 치) 입니다. 즉 남의 것을 공짜로 탐내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염치 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동을 할 때   “몰염치(沒廉恥)하다”,  “파렴치(破廉恥)범 이다”.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비판을 합니다. 

본문 에스겔 23장은 당시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멸망해 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생생하게 고발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의 눈부신 문화와 번영을 부러워하며 따르고 그들의 잔인한 과정을 답습하다가  자기 자신과 강대국에게 실망하고 거꾸로 그 나라들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문명과 번영을 추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문명을 일구어낸 도구이자 잔혹한 방법론, 곧 ‘폭력의 시스템’ 그 자체를 동경했기 때문입니다. 

23장 초반부에 길게 나열된 제국의 모습—’자색 옷, 고관과 사령관, 말 타는 기병, 허리를 묶은 띠와 머리의 긴 수건’—이 모든 화려한 상징은 주변 수많은 약소국의 고혈을 빨아들이고 조공을 갈취하여 쌓아 올린 폭력의 산물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비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들을 흠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국보다 훨씬 더 잔인한 방식으로 그 성공 공식을 자기 동족들에게 그대로 적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 22장을 보면 고관들은 뇌물을 받았고, 높은 이자로 이웃을 수탈했으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힘과 자본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냉혹하고 야만적인 사회로 전락한 것입니다. 마침내는 자신의 자녀들까지 불태워 우상의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존 번연의 고전 《천로역정》을 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이 시온 산을 향해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허례(Formalist)’와 ‘위선(Hypocrisy)’이라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합법적인 문을 통과하지 않고, 구원의 길 담장을 훌쩍 넘어서 들어왔습니다. 크리스천이 왜 문으로 오지 않고 담을 넘어왔느냐고 묻자, 그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담을 넘어 들어가는 것은 우리 동네에서 수천 년 동안 해오던 관습이라 아무 문제 없습니다.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 들어갔는지가 뭐가 중요합니까? 어쨌든 지금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담을 넘어온 우리나 그 좁은 문을 통과해 들어온 당신이나 지금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이 뻔뻔하고 몰염치한 태도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세상의 지탄을 받는 수많은 비극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떤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번영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몰염치에서 파렴치와 후안무치로

한자에서 ‘몰염치(沒廉恥)’는 없을 몰(沒), 청렴할 염(廉), 부끄러워할 치(恥)를 써서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아예 결여된 상태를 뜻하고, ‘파렴치(破廉恥)’는 깨뜨릴 파(破) 자를 써서 마땅히 지켜야 할 염치와 양심을 스스로 깨부수고 저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몰염치가 도덕적 수치심의 감각 자체가 메말라 눈치 없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도덕적 결핍’의 상태라면, 파렴치는 넘지 말아야 할 인간의 기본 도리와 선을 알면서도 사리사욕을 위해 고의로 짓밟고 해악을 끼치는 ‘능동적 파괴’를 의미하며 이들은 이모든 과정에서 전혀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태도를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부릅니다. 즉, 두터울 후(厚), 얼굴 안(顔), 없을 무(無), 부끄러워할 치(恥) 자로 이루어져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꺼워 부끄러움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수치심을 완전히 상실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당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얼굴을 붉히거나 뉘우치기는 커녕 도리어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극단적인 위선과 몰염치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겔 23:17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던 강대국의 잔인한 진면모를 본 순간 그들을 흠모했던 자신과 그 강대국에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17절에서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야카(יָקַע)는  ‘탈골되다’, ‘찢겨 분리되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정이 떨어졌다”는 수준이 아니라,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 소름 끼치는 환멸, 자신의 뼈를 스스로 깎아내는 듯한 자기모멸과 수치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혐오감 을 느낀 이후에 이스라엘의 선택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또다른 강대국 이집트를 찾아 떠나간 것입니다. 

에스겔 23:18–19 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드러내며 그의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하여 떠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여 떠났으나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음행하던 날을 생각함이라“

도입부에 서술한 영화(오딧세이) 에서도 이런 염치에 관한 규범이 나옵니다. 당시는 세상을 다스리는 “제우스의 법(크세니아)”이 있는데, 이는 고대 지중해의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신성한 환대 규범으로, 주인은 낯선 나그네의 신분을 묻기 전에 조건 없이 숙식을 베풀고 배웅 선물을 주어야 했으며, 손님은 주인의 호의를 악용하지 않고 재산과 평화를 지켜주는 염치와 절제를 다해야 했습니다. 만약 주인이 손님을 박대하거나 손님이 주인의 환대를 배반하고 약탈을 일삼으면, 나그네의 수호신인 ‘제우스 크세니오스’의 법을 짓밟은 자로 규정되어 가차 없는 신의 심판과 파멸을 맞이했습니다. 주인공은 이런 제우스의 법을 어기고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들른 섬에서 노인의 가축과 음식을 빼앗으면서 두려움에 떠는 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 하지 마세요 우리는 야만적인 바다민족이 아닌 그리스 문명인 입니다.” 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며 스스럼 없이 주인의 물건을 약탈해 갑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 들이 법적인 권리를 이용하여 불신자들 보다 더 잔인하고, 포악하게 힘과 자본의 논리를 이용하여서 약자들의 자원을 착취하거나,  세상의 성공 방식을 고스란히 답습하며, 비즈니스와 직장 생활, 자녀 교육 현장에서 이를 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염치를 잃어버린 교인들 때문에 상처받은 많은 불신자들에게 “오디세우스 처럼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크리스천 입니다. 안심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후안무치 한 얼굴로 천연덕 스럽게 이웃들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는 안을까요?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문명화된 그리스의 영웅’이라 불렀지만, 실제 행동은 당대 지중해를 공포로 몰아넣던 야만적인 ‘바다 민족(해적)’과 같았습니다. 이는 자신을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라 부르며 제국의 폭력을 답습하던 유다의 자기모순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염치를 지키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다.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 (퀴클롭스)의 동굴에 무단 침입해 음식을 먹어 치우고 오만하게 손님 선물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이 먼저 신성한 환대의 법을 깨뜨리자, 그가 마주하는 세계 역시 나그네를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사람을 돼지로 만드는 마녀 키르케, 배를 부수고 선원을 작살로 꿰어 사냥하는 라이스트리고네스 거인족 등 철저한 야만의 세계로 돌변했습니다.  

제국의 방식을 빌려 부와 안보를 얻으려던 유다의 시도는 결국 가장 잔혹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의 보물과 백성의 고혈을 바쳤던 강대국(연인)들은 은혜를 갚지 않고, 가장 잔인한 침략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불의한 타협, 속임수, 편법으로 쌓은 부와 권력은 위기의 순간 결코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의지했던 세속의 시스템은 신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단물이 빠지는 순간 가장 가혹하게 등을 돌립니다. 

에스겔 23:22, 25–26 “내가 네가 싫어하여 마음이 떠난 네 연인들을 일으켜 그들로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 그들이 분노로 너를 대하리니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릴 것이요 남은 자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네 자녀를 빼앗아 가고 … 그들이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에스겔 23:32–33 “네 형의 잔 곧 크고 깊고 가득 찬 잔을 네가 마시고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할지라”

신자가 세상의 악한 방식을 답습하여 성공할 때, 세상은 결코 그것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더하다”, “예수 믿는 것들이 더 지독하다”는 맹렬한 조소와 지탄을 퍼부으며,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수치로 되돌아옵니다.  또한 일터와 가정에서 약자를 착취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주일에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위장하는 부모의 모습을 볼 때 자녀들은 신앙 자체를 ‘역겨운 위선’으로 규정합니다. 자녀의 안락을 위해 신앙적 양심을 팔아 넘긴 결과는 자녀들의 영혼을 세속에 바쳐버리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고전 《관자》는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 중 분수를 지키는 ‘염(廉)’이 무너지면 사회가 뒤집히고, 허물을 부끄러워하는 ‘치(恥)’마저 끊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멸망에 이른다고 경고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착취에 질려 영혼의 탈골을 겪으면서도, 참된 회개로 나아가지 못한 채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또 다른 우상인 애굽으로 도망치다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는 힘은 우리의 삶속에서 잃어버린 염치를 되찾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큰일을 하거나 기적을 일으키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염치 없는 세상 속에서 몰염치한 행동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상식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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