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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ICU 에서 I See You 로 (고전13:1-10)_캐다다동신교회 박태겸 목사

ICU 에서 I See You 로 (고전13:1-10)

캐다다동신교회 박태겸목사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고 열매맺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받아도 우리의 위치는 달라집니다. 부족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바로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잊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사랑과 무엇이 다릅니까?” 영원히 믿을 수 있고, 영원히 의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변치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한마디로 ‘영원한 친밀감’에 있습니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예술에 담긴 정신 같은 것입니다. 그 잔상과 감동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듭니다. 인간의 심장은 언젠가 멈추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은 인간이 죽고 천지가 없어져도 인류에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영원한 것의 특징은 비교당하지 않는 점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끝나지 않는데 있습니다. 영원성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처음과 나중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세월의 가치와 변화에 따라 본질이 변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코로나가 준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형식과 틀이 깨어지고 본질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도 변합니다.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도 드러납니다. 모든 지식과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헛된 것이 됩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구제하며 내 몸을 불사르는 희생도 변합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계속되는 진리와 가치로 남아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직도 하나님도 자신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울은 ‘기다림의 노래’로 부릅니다. 무조건 이유도 없이,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량이 미달했다고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또 기다리고 다시 기다려주며 끝까지 바라보고 기다리십니다. 이는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이 ‘완전한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가면 우리의 짐이 쉽고 멍에가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으면 그 안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이런 “영원한 친밀감”인 사랑은 주님이 세운 교회를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건물이나 교파가 아니라 ‘회중들의 모임’ ‘부르심을 받은 자들’ 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내가 교회요 우리가 교회입니다. 이때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얻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됩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5대 요소는 <예배와 교육과 친교와 봉사와 선교> 입니다. 이것이 잘 이행되는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렇지만 ‘예배’에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빠지고, ‘교육’에 잘못한 것을 바로잡으려는 질책만 있고, ‘친교’가 자기가 친한 사람들끼리만 교제하고, ‘봉사’에 감사와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남에게 과시하고, ‘선교’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런 교회를 통해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인 “친밀한 사랑”을 교회가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콜롬부스는 농장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다가 신대륙으로 향했습니다. 이는 호기심의 발효입니다. 세상은 지식으로 움직여 지느냐, 정의로 바로 세워지느냐를 토론하면서 국가는 발전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발효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율법이 먼저냐, 복음이 먼저냐?로 다투는 자들을 모두 용납하는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인 사랑의 발효입니다. 성경은 너무나 분명히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7,8)

그렇다고 예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미래를 여는 열쇠이다. 그렇지만 예언에만 매여있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이 오면 주님이 성취하시고 완성할 것입니다. 방언은 소중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입술에 방언이 터집니다. 그렇지만 방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천국방언이 임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지방 방언은 희미해집니다. 천국방언이란 누구나 잘 알아들을 있고 감동을 받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존경합니다. 격려합니다” 이것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발견하게 합니다.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묘약입니다. 그것으로 완전한 인격과 공동체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고백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그러므로 땅에서 하늘까지, 해돋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 영원한 사랑을 향해 달려갑시다. 하나님이 계신 곳엔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완전한 사랑>은 11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4-6절) 1) 사랑은 오래 참고 2) 온유하며 3) 시기하지 않으며 4) 자랑하지 않으며 5) 교만하지 않으며 6)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8) 성내지 아니하며 9)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10)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11)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중에서 몇 가지를 가졌습니까? 만일 3, 4개만 가져도 <완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11가지 모두가 포함된 얼굴을 보고 감격할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얼굴을 한번 보기만 해도 당신은 변할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완전하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사랑은 가까운 가족도 상처를 받습니다. 나의 사랑은 1) 조급하고 2) 욱박지르고 3) 질투하고 4) 뽑내며 5) 내가 잘났으며 6) 상대가 나보다 약하면 무시하고 7) 내 이익에 민감하며 8) 속으로 화가 나있으며 자주 속이 상하며 9) 의도가 악하고 경쟁하여 짓밟으며 10) 거짓되고 속이며 11) 진리되신 주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너무나 제한적이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는 날마다 성화하여 상처받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줍시다. 

저는 목회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준 것도 주님 사랑으로 했느냐, 나의 의로움으로 했느냐?” 입니다. 그가 왜 울고 있는지? 왜 어려워하고 있는지? 내가 아파 보니까 주의 사랑으로 한 것은 상대를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친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을 했지 상대가 원하는 사랑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야내가 그렇게 이가 시려워 사과를 얇게 잘라주면 먹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 혼자 사과를 꺼내 바삐 통채로 씹어먹기에 급급했습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탐욕으로 달려가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된 신앙을 가지고 남의 행위를 판단했습니다. 간장게장이 ‘밥도둑’ 이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인간의 포장된 선행은 ‘예수님 도둑’ 입니다. 나는 포장된 선행으로 하나님의 의를 끊임없이 도둑질하며 거짓 열매를 맺고 그것이 죄악임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습니다. 슬픔을 당한 자를 향하여 같이 아파하기보다 이렇게 접근했습니다. “기도하면 되지 왜 우세요?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이정도 일로 그렇게 힘들어 하세요? 요즘 불평이 많은 것을 보니 감사생활이 사라졌네요? 무슨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이 일어났겠어요?” 이런 나의 판단은 나와 모든 성도를 낙심하게 만들고 쓰러지게 했습니다. 나의 행위의 의가 <하나님의 사랑>보다 커질 때 신앙생활은 종교행위로 변하고, 이런 반응은 생명을 구원하지 못하는 교회로 전락함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겐 성령의 역사와 치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언의 한 부분, 진리의 끝자락을 붙잡고 살기보다 사랑의 본질을 붙잡아야 삽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듯이(롬14:23), 사랑의 띠로 묶어지지 않는 행위는 주님께 상달되지 못합니다(골3:14). 나의 상급은 면류관이 아닌 개털모자였습니다.

우리를 온전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 사랑’ 뿐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사랑이 빠진 모든 것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건물, 스시템, QT, 쎌, 미디아, 선교, 교육, 제자훈련, 찬양대 이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이 부분적인 것이 완전해지려면 ‘사랑의 아교’가 들어가야 합니다. 성도가 지나간 자리마다 ‘사랑의 향기’가 피어나야 합니다. 옳은 일을 한다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옳은 것은 많지만 거기에 사랑의 피가 흘러야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벧전4:8)

당신은 기적을 믿습니까?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이번에 저는 무능해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시는 참 기적을 만났습니다. 작년 5월에 저희 교회 한 어르신이 기침과 발열이 심해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긴급으로 옥빌(Oakville)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가족들은 모친이 코로나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운줄 알았고 본인도 이제 끝이구나 생각하여 한국에 떨어진 자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유언을 남기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ICU(Intensive Care Unit)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중환자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의 인사인 “I see you” 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느낍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을 둘러싼 역사를 봅니다.”라는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르신을 어루만지는 사랑의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음식도, 가족도, 치료약도 들어올 수 없는 완전 폐쇠된 공간에서 성도들의 사랑의 기도가 향기되어 들어갔습니다. 점점 그의 마음이 낮아지고 평안해지면서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단순 폐염으로 진단되어 ICU에서 일반병동으로 옮져지고, 점점 몸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퇴원하였습니다. 이것은 결혼과 가족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회나 직장이나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교육과 경영의 핵심은 제도나 행정시스템이 아닙니다.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사랑의 관계보다 사람의 일이 먼저 보이게 되면 성과에 얽매이고, 성령이 떠나가고, 사탄이 서로 사이에 들어와 경쟁하며 갈라지게 만듭니다. 그땐 나의 허물보다 상대방의 약점이 더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의 허물을 가려주기 시작하면 다툼이 사라지고 사랑이 싹틉니다. (잠10:12) 성령이 일하기 시작하고 사람이 사랑스러워지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엡3:20,21) 이것이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적입니다. 이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교회요 성도 사이입니다. 이런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교회는 영원하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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