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설교단상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롬 8:18-30)_크로스교회 이홍건 목사

[설교단상]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롬 8:18-30)_크로스교회 이홍건 목사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롬 8:18-30)
크로스교회 (이홍건 목사)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물건 하나를 살 때에도 이것 저것을 비교하고 선택합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를 당하며 혹은 스스로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비교의식”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스스로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열등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스스로 우월감과 교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때로는 열등감에 빠져서 실패자처럼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며 절망과 낙심으로 살아가고, 때로는 우월감에 빠져서 교만한 마음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비교의식이 우리를 해롭게 하고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가인 알프레드 아들러 라는 분이 있습니다. “미움받을 용기” 라는 책으로 우리에게는 더 잘 알려진 분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인간이해를 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열등감과 삶을 좌절시키는 열등컴플렉스를 구별했습니다. 열등감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감정입니다. 인간은 무기력하고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고 더 나아지지를 바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열등감 혹은 우월성추구 라고 합니다. 그와 반대되는 것이 열등컴플렉스입니다. 우월성 추구나 열등감은 그 자체로는 병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위한 자극일 뿐입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 하고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가간다면 그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열등감이 아닌 열등컴플렉스입니다.

쉽게 말하면 건강한 비교의식은 우리를 더욱 발전하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비교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농담으로 ‘개와 사람이 달리기 시합’ 을 해서 개와 비교해서 잘하면 개보다 더한 놈이 되고, 개보다 못하면 개보다 못한 놈이 되고, 개와 비슷하면 개같은 놈이 되는 것처럼 문제는 비교의 대상입니다. 비교하는 대상이 개이면 개가 그 사람의 삶의 기준이 되고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비교하는 대상이 세상이면 세상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비교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나의 인생의 기준이 되고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은 비교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분이 바뀐 것처럼 비교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도다. 지금 로마 제국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로마의 귀족들과 비교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세상의 힘과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초라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과 비교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교의 수준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장차 그 영광에 서게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때의 영광을 지금의 고난과 비교하면 고난이 고난이 아니라 잠시 불편한 것이고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비교할 대상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존전에 변화되어 서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주변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비교하며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그 영광 가운데 서게 될 영광스럽게 변화될 나의 모습이 우리의 유일한 비교대상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소망하고 고대하고 살아가도록 돕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첫번째로 나누고 싶은 주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19-20)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고대하는 것은 성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그 영광의 회복을 고대하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죄로 깨어진 우리가 다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기대하지만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말이냐 하면…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만이 깨어져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그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깨어지고 파괴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보실 때마다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라고 감탄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아담(흙)만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땅(피조물)도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흙인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흙)은 죄의 결과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땀흘려 수고해야 땅에서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인 동물들은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뒹굴고 뛰어놀던 관계가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관계로 바뀌고 모든 만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지음받은 인간이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피조물을 파괴하고 착취함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자연의 재해는 근본적으로 따지면 결국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결과이고 그 피해가 다시 인간에게 돌아와 고통이 되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고대하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2)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실체, 죄로 깨어진 자아를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하듯이 자연만물도 죄로 깨어진 상황속에서 “하나님~ 만물을 다스리라고 세운 인간이 자신의 탐욕으로 모든 만물이 엉망입니다. 제발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탄식하고 고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죄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한다는 것은 좋은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부패한 지도자로 부터 고통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좋은 왕,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온전히 회복되기를 정말 고대하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3) 우리 몸의 구속 – 죄에서 완전한 구속 –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본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소망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완전하지 않아도 주의 날에 그 영광 가운데 서게 될 날이 있기에 소망하고 고대하는 것입니다.

  1.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6) “이와같이…” 그래서 성령님이 연약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우리의 연약함이 뭡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 아닙니까? 마음보다 육신의 욕망이 강해지는 것 아닙니까? 육신의 약한 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더 강하게 붙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계속 살피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7)
마음을 살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을 살피시고 성도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너지고 약해진 모습을 보시면서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넘어지면 우리도 탄식하고 성령님도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탄식은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에 부딪히는 탄식이지만 성령님의 탄식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고 아파하는 탄식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이런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엄마 죽고 싶으면 죽어도 돼” 책 제목이 다소 충격적이어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기시다 히로미’ 라는 한 여인이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기구할까 할 정도의 많은 고난을 짊어지고 산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평범한 여성으로 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는데… 둘째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로 태어남으로 인해서 그의 모든 삶이 그 아이를 돌보는 일에 전념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39살에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가정의 생계까지 책임쳐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고 삶의 무게는 점점 더 무겁고 힘겨워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날 머리를 빗으려고 브러시를 들어올리는 순간 가슴에서 소리가 들릴 정도의 충격이 있었고 가슴의 통증을 느꼈습니다. 병원에서 결국 그 통증은 치사율 50% 라는 “대동맥해리” 라고 판정이 되어서 큰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술로 인해서 생명을 건졌지만 가슴밑으로는 마비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수술뒤에 재활을 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 고통이었고 심지어는 누워서 지내야 하는 현실 때문에 몸에 욕창까지 나고 악화되어 다시 성형외과이 대수술을 두번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통의 시간들은 점점 슬픔과 답답함을 넘어 자기 혐오로 변해갔습니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비참함,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라는 심한 자괴감까지 밀려왔습니다.

그런 마음이 극에 달해서 곁에서 병간호하며 돌보는 딸에게 ‘이런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도 싫고, 엄마로서 네게 해 줄 수 있는 일도 하나 없어. 그냥 죽고 싶다. 그냥 내가 죽게 내버려둬 부탁이야’ 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말을 하고 아차하고 싶었는데 딸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그때에 그 딸이 한 말이 “엄마, 죽고 싶으면 죽어도 돼” 딸의 그 말을 듣고는 오히려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딸이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병원 생활 하는지 알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괴롭다는 것도 알고 있어. 엄마가 정말 못 견디겠다면 같이 죽어줄 수도 있어” … “하지만 엄마, 반대로 생각해봐. 만약 내가 엄마랑 같은 병에 걸렸다고 쳐. 엄마는 내가 싫어질 거 같아? 나를 귀찮다고 생각할꺼야?”

그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이 여인의 삶의 방식과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와 고통이 오히려 다른 환자들의 고통을 가슴으로 들어주고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의미를 찾게 되었고 나중에는 장애를 가지고 사람들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강연을 하며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에도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보며 깊은 탄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엄마를 바라보며 아파하는 딸의 깊은 탄식이 있습니다. 그 여인의 탄식이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자신의 한계를 보고 여전히 죄에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비참함에서 오는 우리들의 탄식이라면,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아파하는 성령님의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탄식은 다릅니다. 우리의 탄식은 무기력함과 절망에 한계에 부딪힌 탄식이지만 성령님의 탄식은 우리의 한계와 고통을 공감하고 탄식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돕고 붙들어주고 위로하는 자리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3) 우리 안에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연약함을 깊이 공감하면서 우리를 위한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함께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양자로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기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힘내십시요.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거룩한 열매를 맺기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8) 그래서 “우리가 알거니와” 이말은 “너희도 이미 알고 있잖아” 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말합니다. 성경의 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의 고난을 통해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지는지… 이미 우리들이 보게 하셨고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인생에 경험한 수 많은 고난이 그 때에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고난이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었지만 결국 그 고난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의 예를 든다면 요셉이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고난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16이라는 십대에 나이에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50세가 가까운 나이에 출산을 하다가 어머니인 라헬이 세상을 떠납니다. 아직 어린나이인데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난 슬픔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야곱은 더욱 요셉을 다른 자녀들보다 특별한 마음으로 대해주었습니다. 채색옷을 입힌 것은 그런 특별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고, 형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꿈을 자랑하는 철없는 모습에도 야곱은 요셉에게 너그럽게 대한 것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극에 달해 죽이기려고 했다가 결국은 미디안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에게 일했지만 그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오히려 감옥에 갇히고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을 도왔지만 그들은 그를 잊어버리고 결국 극적으로 바로의 꿈을 해석해줌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 감당하기 힘든 고통들이 결국 자신의 민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일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 고난이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모든 환란으로 지키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 요셉의 인생에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과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요셉의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의 변화입니다. 요셉의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가장 큰 변화는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아니라 예수를 닮은 요셉입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형제들의 행한 일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다 내려놓고 그들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해있는 요셉의 모습입니다. 요셉의 실체를 알고 복수당할까 두려워떨고 있는 그들에게 “근심하지 마십시요. 한탄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저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낸 것 뿐입니다. 형님들의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우리들의 후손을 이 땅에 보존하시려고 저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라고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셉이 구약에 예수님의 예표라고 하듯이 예수님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의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9-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9-30)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분명한 목적입니다.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를 더욱 선하고 거룩하게 인도하셔서 결국 하나님의 그 영광스런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신 분이 바로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따라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성령님은 포기하지 않고 도우실 것입니다. 탄식하시며 아파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며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를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