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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부부제자 7주 시리즈(7)”부부제자와 자녀(children)”

부부제자 7주 시리즈_7주차_”부부제자와 자녀(children)”

본문: 에베소서 6장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몇 달 전에 그레이스교회에서 350여명 교우들에게 코로나와 관련한 여러가지 질문을 설문지 방식으로 조사를 했다. 그 질문들 가운데 코로나로 인해 가장 걱정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여러분은 코로나로 인해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압도적인 퍼센트로 1등을 한 질문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개인 본인의 영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내용이었단다.  

COVID 19으로 인한 팬데믹 시기에 교회에서 대면으로 예배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다른 교회 권사님께서 인터넷으로 드려지는 예배로 바뀌면서 처음에는 집에서 정장으로 예배드리다가, 점점 편한 복장으로 바뀌더니 언젠가는 소파에 누워서 예배드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셨다. 태도와 자세뿐 만 아니라 체험과 감흥이라는 차원에서 점점 자신이 편한 쪽으로 자신이 행하고 있음에 대한 자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는 어떠한가? 지난 시간 동안 우리의 영성은 어떠한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가? 이웃을 위한 섬김의 행함이 늘었는가? 우리도 이 질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고 우리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우리의 영성은 더욱 하나님과 친밀해지며, 이웃을 사랑하게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또 있다. 과연 우리 자녀들의 영성은 어떠한가? 지난 시간 동안 우리 자녀들이 더욱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있으며, 이웃을 위한 사랑의 적용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부부제자로서 또다른 제자인 자녀들에게 어떤 양육을 행하고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지도하고 있는가? 어떤 기도를 같이 하고 있는가? 

오늘은 지난 7주간 함께 말씀 가운데 살펴보았던 부부제자 7주 시리즈의 마지막 주일이다. 오늘 설교제목을 ‘부부제자와 자녀’라고 정했다. 이런 말이 있다. “치과에 가면 칫솔이 어디에 안닿는지 알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칫솔이 안 닿는 부분이 늘 있다. 그런데 잘 인식하지 못하고 신경쓰지 못하다가 치과에 가서 구석구석 봐주시는 의사선생님이나 스케일링 해주시는 선생님을 통해 듣게 된다. 어떤 치아가 부식되거나 충치가 생기거나 치석이 생겼다고 말이다. 

우리 자녀들이 꼭 그런 것 같다. 우리랑 함께 있어서 오히려 제대로 못보는 경우가 있다. 신경써서 양육한다고 하지만 소홀한 부분이 늘 있다. 그래서 부부제자로서 자녀를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확인하고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양육하다(엑트레포, ἐκτρέφω)의 뜻은 ‘영양을 공급하다’ 또는 ‘기르다’는 뜻이 있다. 부부제자에게 한 영혼을 맡겨주신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동안,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는 자녀들을 양육할 의무와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그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 먼저 자녀(Children)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 자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양육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우리 옆의 자녀들이 있다면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리고 이렇게 말해 보자. “이 인간아, 이 사람아” 물론 “이 인간아~, 이 사람아~” 그러면 좋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사람은 동물이나 식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뜻이 된다. 동물과 식물과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인 이유는 인간에게는 영(spirit)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우들에게는 몇 번 반복하지만 이것이 중요하기에 한 번 더 말씀드리길 원한다. 교육과 양육은 반복이라고 하지 않던가. 부부제자로서 우리의 자녀들을 바라보는 4가지 관점이 있다.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먼저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자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런데 이 창조된 피조물에게 원죄가 있다. 원죄는 3만이라고 정리되는데, 교만, 태만, 기만이다. 우리 자녀들은 자기 자신만을 높이며, 게으르며, 거짓을 행한다. 그렇게 타락한 자녀이지만, 구원받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후에는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존재다. 이 양육은 결국에는 완성되는 시점이 있다. 이런 정체성이 우리 자녀에게 있다.

(종이컵 준비) 여러분, 여기 종이컵이 있다. 종이컵은 목적이 있게 만들어 졌다. 컵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물을 담는데 있다. (종이컵에 물을 붓는다.) 물을 담으려면 컵은 위를 향하게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컵을 우리 인간에 비유한다면,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통한 영적소통, 다른 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를 Form(창조)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 중에서 이 목적대로 쓰임받기를 싫어해서 배신한 존재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하신 천사였던 루시퍼는 결국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사단이 되었다. 사단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목적과는 다르게 (컵을 찌끄러트린다.) 하늘 향하여 벌린 입을 다물고 ‘꺼꾸로 살라고(Up-side Down)’, ‘네 인생은 네가 왕이니 네 마음대로 살라.’고 한다. 

구겨진 컵은 그 컵이 본래 가졌던 능력을 상실한다. (구겨진 컵에 물을 붓는 시늉을 한다.) 구겨진 컵은 쓸 수 없고, 쓸 곳 없고, 쓸(둘) 필요 없어진다. 컵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를 타락(Deform)이라고 한다. 사단의 타락 이후에 사람도 그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타락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들의 관계가 파괴 되었다. (인식 능력의 전락) 값어치가 상실되었다.(도덕적 능력의 전락) 쓸모 없어지게 되었다.(자연계의 전락) 이것이 타락이다. 부패하고 썩은 냄새가 나고 결국에는 죽는 존재가 된다. (요 11장) 이것을 우리는 Deform(타락) 되었다고 한다.  

더 이상 물을 부어서 마실 수도 없는 컵은 쓸모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시며 고쳐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이를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고자 즉 Down-side Up시켜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구겨진 컵을 펴면서) 그 구원의 이름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를 구원(reform)시키시려고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라고 하신다.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reform(구원) 된다. 이를 다른 말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구겨진 컵을 다 편 다음에 그 컵에 물을 붓고 물을 마신다.) 원래대로의 완벽함은 아니지만, 물을 마실 수 있는 컵이 된다.  컵으로서의 목적을 회복하고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렇다. 자녀를 볼 때, 창조, 타락, 구원(구속), 완성이라고 하는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자녀들을 볼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볼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을 되뇌여야 한다. 그러면서 이 관점으로 자녀를 보고 있으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어야 그 때부터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게 된다. 아직 예수님께 받은 구원이 가물가물한데 예수님의 교훈이나 훈계가 들어갈리 없으며, 예수님이 빠진 상태의 교훈과 훈계는 부모의 잘못된 가르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최근에 나(차라투스트라)는 악마가 이런 말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인간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죽었다.’” 악마가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인간들을 위한 사랑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셨다. 인간의 죄를 도말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시게 하시기 위해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런 생명의 주인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교훈과 훈계를 늘 요청하고 묻고 받아서 그것으로 양육해야 한다. 

게리 콜린스의 그의 책 [코칭 바이블]에서 코칭의 정의를 “코치는 현재 지점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점까지 안내하고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녀들의 최고의 코치는 바로 부모임에 틀림없다. 누가 한 인생을 그렇게 지켜보며 사랑으로 이끌어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부모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보면 ‘나의 교훈과 훈계’가 아니라 ‘주의 교훈과 훈계’라고 했다. 분명히 소유격이 주님께로 되어 있다. 

우리 자녀들은 단번에 우리 부모가 제자인지 아닌지, 말씀대로 사는 지 아닌지, 기도하며 사는 지 아닌지를 알아낸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너무나도 부모를 파악하는데 빠르다. 사실 어느 부모도 완벽하지 않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우리 부모님들 “참 애쓴다”라고 생각해야 된다. 그 과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배우자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식어진 사랑으로 대한다면 아이들이 분명하게 알아챈다. 하지만 은혜, 인내, 사랑에서 나오는 태도와 마음 가짐으로 대한다면 그것도 분명하게 포착해낸다. 지금 우리 부모는 어떤 메시지를 자녀들에게 보내고 있는가? ‘우리 부모님은 잘 안되고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심각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고 노력한다’라고 인정받고 있는가? 

아이들이 욕을 하거나 야한 동영상 등을 보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가 갈수록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이 하나 있다. 앞으로 부모세대보다 우리 자녀들의 세대가 더욱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쉬워질 것 같은가? 아니면 더 어려워질 것 같은가? 시험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믿음 생활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에게는 현재 부모보다 더 강한 저항력이 필요하다. 

편안한 환경에서 자녀를 강하게 키울 수 없다. 미래의 형편이 더 나빠질 것이 뻔함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저항하고 인내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 한국에서 사역을 마치고 캐나다 랭리로 2012년에 다시 오게 되면서 아내와 함께 ‘크리스챤 스쿨’에는 보내지 말자고 했다. 아이들이 화초가 아니라 잡초처럼 야성있는 믿음을 훈련받기 위해서 공립으로 보내자고 이야기하였다. 물론 크리스챤 스쿨의 강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때 들었던 생각은 앞으로 믿음의 야성이 아이들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핍박이 있는 상황에서 더욱 예수님을 따르는 용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육이 무엇인가? 현실에 뛰어들어 온전히 살아갈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편한 길이 아니라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하셨던 것처럼 박해가 있으며 시험과 시련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그 때에 시험과 시련을 피하지 말고 견대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하신 말씀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신명기 32장 46-47절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헛된 일이 아니라 생명이 자녀들에게서 자라길 소망한다. 

우리 부부 먼저 제자되기를 힘써야 한다. 부부가 먼저 말씀으로 살려고 해야 한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부모를 보면서 자녀들은 큰 한숨을 내쉬고 있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부모에 대해서 걱정도 해주고, 염려도 해주지만 또한 자신이 분명히 개혁가가 되기 보다는 편한 쪽으로 안전한 쪽으로 중립적인 스탠스를 가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은연 중에 파악하고 있다. 그저 그렇게 편하고 안전한 쪽으로 슬금슬금 넘어가려고 한다. 

따라서 분명히 할 것은 서로에게 즉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되어야 할 피조물임을 고백하자. 그리고 앞으로 더욱 시련과 환난과 핍박이 강해지는 이 시대에 서로 윈윈(win-win) 할 수 있도록 동역자가 되자고 해야 한다. 옆에 자녀들이 있다면 함께 손을 잡자. 그리고 ‘파이팅’이라고 서로 외쳐주자. 예수님의 교훈과 훈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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