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그리스도 관점으로 본 요시야 왕의 신앙부흥(열왕기하 22:1-20, 23:1-3)_이경원 목사(밴쿠버 목양교회)

그리스도 관점으로 본 요시야 왕의 신앙부흥(열왕기하 22:1-20, 23:1-3)

이경원 목사(밴쿠버 목양교회)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이 언급한 성경은 주로 구약 성경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27권이 하나님 말 씀인 성경으로 자리를 잡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인해 구약 성경을 보는 관점이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과 본질적인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즉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은 유대교 입장에서 구약을 이해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약 성경을 보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두 가지 입장을 고수했다. 첫째는,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보여주고 있으며, 둘째는, 곧 임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목적으로 성경을 대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믿음의 점검 차원에서 성경을 이 해하고 묵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인 요시야 왕의 신앙부흥이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며 순종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열왕기하 22장과 23장 1절에서 3절까지 요시야 왕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적 구속 사역의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도 그리스도적 사역에 동참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1 | 요시야 왕의 등장은 어두운 시대에 빛으로 등장한 왕이었다. (왕하 22:1-2)

요시야 왕이 등장한 시대는 한마디로 영적인 암흑시대였다.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고, 남쪽 유다도 악한 왕들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참으로 영적으로 어렵고 소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요시야 왕이 등장하여 신앙의 부흥이라는 하나 의 빛을 밝힌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그 당시에도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 선지자의 하나님 말씀 선포 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에게 있어서 한 마디로 영적 암흑시대라는 의미다.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빛을 밝혀주셨다.

요시야의 등장과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우리 인간의 죄가 아무리 깊고 사람들은 타락하여도 우리를 향하신 하 나님의 소망의 빛은 언제나 밝혀 주신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소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구원의 역사 때문이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빛으로 밝히신다. 우리의 형편이 아 무리 부족하고 자격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소망의 말씀을, 소망의 부흥을 허락 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이나 교회도 소망이 없거나 가능성이 없는 개인이나 교회는 없다. 우리 모두다 하나 님 앞에 다시 살아날 소망과 그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 요시야 왕은 제일 먼저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왕하 22:3-7)

요시야 왕은 한 나라의 왕 위에 올라 제일 먼저 한 일이 군사적 보강이나 경제적 회복이 아닌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일에 제일 먼저 헌신한다. 그는 믿음의 회복이 제일 중요함을 보여주는 영적인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서를 보게 되면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 한 마디로 장사꾼들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닌 도적의 굴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예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요한복음 4장에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예배에 관한 말씀을 나누셨다. 이 때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문제였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성령을 언급하셨다. 즉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삼 일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 이로 인해 성령을 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었다.

요시야 왕의 성전 수리를 통해 얻는 영적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한번 정결해야 한다. 그 래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기 때문이다. 신앙 부흥의 제일 먼저는 바로 참된 예배의 회복이다. 신앙생활의 첫 걸음도 참된 예배의 회복이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우리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예배가 물러가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기를 기도한다.

3 | 요시야 왕은 율법책 앞에 자신의 옷을 찢는다. (왕하 22:8-20)

요시야 왕을 통해 시작된 성전 수리,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율법책을 요시 야 왕에게 가져온다. 요시야 왕은 이 율법책 앞에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를 한다.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말씀 앞에 겸손의 모습, 더 나아가 회개하는 의미가 있다. 율법책은 단순한 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즉 요시야는 하 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것이다. 우리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는 심판이었다. 그 어떤 인간도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철저한 겸손과 회개만 이 우리가 살아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요시야 왕은 율법책 앞에 즉 철저한 겸손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이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없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취하셨고, 그 육신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찢으셨다. 요시야는 자신의 옷을 찢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을 찢으셨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기 위함이셨다.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길이 열렸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사도행전 2:37-41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 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요시야 왕이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을 찢으신 것과 이로 인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의미한다. 요시야 왕이 자신의 옷을 찢는 두 번째 의미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을 찢는 일들이 일어날 것과 이러한 자세는 회개를 통한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일들이 일어날 것을 보여준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 말씀 앞에 마음을 찢고 회개를 통해 성령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요시야가 살았던 세대도, 사도행전 2장에 있었던 사람들도, 베드로 고백처럼 다 패역한 세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세대에 살고 있는가?

4 | 요시야 왕은 유다 백성을 한 자리에 모은다. (왕하 23:1-3)

요시야 왕은 발견한 율법책인 하나님 말씀을 혼자 듣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유다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 아 함께 듣는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신앙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신앙 부흥의 핵심은 이것이다. “마음과 뜻 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을 찢으신 사건, 이로 인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시 는 하나님의 은혜, 이 은혜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역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곧 교회 이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드리신 그 주님의 몸이, 이제는 믿는 자들로 인해 주님의 몸을 더 확장하게 하신다. 이 믿는 자들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이다. 이 때 주님의 몸이 세워지며 이 주님의 몸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서 베푸시는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노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멘 하는 역사, 이것 이 교회요, 천국이다. 신앙 부흥의 열매는 곧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요시야 왕을 통해 그리스도적 사역을 함께 살펴보았다.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과 성령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적 사역에 참여해야 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1 |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요시야 왕이 살았던 그 시대 도 참으로 어두운 시대였다.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였던 므낫세 왕(왕하 21:1-18)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범한 악한 왕이었다. 아마 유다 나라에 므낫세 왕처럼 악을 행한 왕도 없었을 정도로 악한 왕이었다. 그리고 요 시야의 아버지인 아몬도 악한 왕(왕하 21:19-26)이었다. 결국 그를 반역한 사람들이 아몬을 죽이고 말았다. 이 런 상황에서 요시야는 성장하였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둠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 빛의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왕하 22:1-2)

우리 신앙인들 또한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빛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또 불공평과 불의가 지배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빛의 삶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이 빛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죄가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 세상 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비추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포기하거나 가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삶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는가? 다시 한번 빛 의 삶으로 일어서길 바란다. 나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을, 한 공동체를 지옥으로 만들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행동이 복음의 소망이 되어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천국을 만들어가고 세워사는 사명자가 되길 바란다.

2 | 요시야가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듯이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들로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 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령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늘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함과 동시에 성령 의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을 위해 헌신되어야 한다. 오늘날 모든 신앙의 어려움은 예배의 실패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령한 예배가 사람들을 만나는 교제의 자리,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시간, 하나님 앞에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성취감이나 만족함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예배가 아닌 ‘나’의 예배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나의 예배는 내 심령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방해하고 교회 생활을 어렵게 한다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신령한 예배자로 선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3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율법책)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 임재 앞에 서는 행위다. 그러나 하나의 책으로 생각하여 접근한다면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할 뿐이다. 물론 우리의 이성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 당신이시다. 말씀을 듣는 것, 보는 것, 묵상하는 것,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행위다. 하나님 앞에 서야 회개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순히 윤리나 도덕를 추구하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크심과 위대하심을 경험하게 되며,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의 한없는 작아짐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마음을 찢게 되며,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회개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적지 않은 신앙인들의 신앙과 예배 가운데 회개가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보다는 신앙이 나의 이성을 근거로 한 종교생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생활은 한 마디로 생명력 이 없기에 결국에는 진리에서 멀어져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4 | 마지막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반응은 결국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운다. 교회는 죄로 인해 어두움에 갇힌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의 빛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자리다. 그러므로 교회는 빛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회이다. 이 성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몸을 직접 찢으시고 또한 삼 일만에 부활하신 그 은총에 대한 감사, 찬양, 그리고 예배를 드린다. 동시에 이 주님은 다시 오실 심판주가 되신다. 다시 오실 심판주 앞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며 신랑이신 주님의 신부로서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준비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매 주일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목적으로 설교를 들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재림을 준 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설교는 자신들의 믿음부터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철저한 점검 및 회개, 그리고 결단을 하였다. 마치 요시야 왕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그들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 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개인주의가 갈수록 심화되어져 가는 현실에서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점검하므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믿음생활이 회복되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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