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가본것같은성지순례] 텔 아라드(Tel Arad)

텔 아라드(Tel Arad)

남북한 합한 강원도 크기만한 땅인 성경의 나라 이스라엘은 그 나라의 면적 반이 광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살수 있는 광야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곳이 있는데, 이것은 일년에 내리는 강수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 이스라엘은 갈릴리 호수 물을 정수하여 북쪽 헬몬산에서 남쪽 브엘세바 도시까지 공급하고 있어서 비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던 성경시대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의 실례로 1950년에 설립된 이스라엘 최남단의 에일랏이란 도시는 일년 강수량이 24mm에 불과하지만 이스라엘 국민들은 지혜를 모아 홍해 바닷물을 정수해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해서 5만명의 사람들이 살수 있는 관광레져 도시로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광야와 네게브 광야 사이에 위치한 고대 도시 아라드는 하늘에서 내리는 귀중한 빗물을 모아 광야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도시였다. 예루살렘에서 100km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고고학 유적지 텔 아라드는 유대광야와 남방 광야의 교차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1962년부터 1984년까지 18년 동안의 발굴을 통하여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650년 사이에 청동기 문명의 문화를 활짝 꽃피웠던 곳으로 증명되었다. 이곳에서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따라 형성되었던 도시문명과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 나메르 (3100 B.C.E)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되었다. 텔 아라드는 이스라엘 왕국 시대 성의 흔적과 가나안 시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스라엘 국립공원이다. 기울어진 대접 모양의 25 에이커 넓이의 성벽을 갖춘 도시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의 도시 텔 아라드 집의 문들은 모두 해가 비치는 동쪽을 향했다. 그리고 겨울에 내리는 비와 새벽에 뿌려지는 이슬이 모일수 있는 수로를 만들고, 바위를 깍아 만든 우물에 물을 저장했다. 우물에 저장된 물은 그 도시 인근의 농사를 가능케 하는 물을 제공했고, 고고학자들은 탄화된 다수의 보리, 밀, 완두콩, 병아리콩, 아마 그리고 올리브 열매를 발견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양, 염소, 그리고 나귀의 뼈도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교역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라드 남쪽 시나이 반도를 통과한 대상들은 북쪽으로 나아갈 때 텔 아라드에서 잠시 쉬어가야 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텔 아라드에서 머물며 일단의 품목을 교환했을 것이다. 실제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들 중에 시나이 반도에서 만들지고 사용되던 전형적인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아라드 사람들은 시나이 반도를 통과해 아라드를 방문한 이집트 사람들과 가나안의 상품들을 교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텔 아라드에 살던 거주민들은 이집트와의 관계가 중요했고, 이집트를 탈출해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대적이었던 것이다.

남방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지라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붙이시매 그들과 그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민 21:1-3)

애굽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아라드 왕에게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 도시를 다 멸하겠다는 서원을 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서원대로 가나안의 도시를 파괴했고, 한동안 그 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의 왕국 시대로 접어들었고, 라기스 성읍과 브엘세바 사이에 위치한 아라드는 사막의 유목민들과 이집트의 침략을 저지하는 요새가 되었다. 기원전 925년 이집트 시삭이 침공했을 때 이스라엘 시대의 아라드는 파괴되었지만 후에 이 성채는 다시 지어졌다.

텔 아라드 국립공원에 도착하면 베두인 출신 관리인에 의해 국립공원 입장권 확인을 받고 아라드 국립공원 설명서를 받는다. 지금부터 5천년 전의 도시 아라드는 먼저 이스라엘 시대의 성채로 올라간다. 이곳에 올라가면 마치 저 멀리 남쪽 남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는 것 같다. 마치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전쟁에 나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끔 텔 아라드의 위치는 근방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산당으로 향하면 기원전 10세기 지방 산당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방 도시에 남아있는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했던 것이다. 1962년 이스라엘 히브리대 고고학자 아하로니는 예루살렘 성전의 설계도와 비슷한 산당을 텔 아라드 이스라엘 시대 성터에서 발굴했다. 산당의 입구에 들어서면 성소가 있고 우측편에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든 제단이 있으며, 지성소 앞에는 야긴과 보아스처럼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 지성소에는 1미터 가량의 붉게 칠해진 주상이 발견되었다. 솔로몬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성소는 누군가에 의해서 파괴된 흔적이 있었다. 누가 지방 성소 제단을 훼파했을까?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은 지방 성소에까지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믿음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3대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겠지만, 나머지 백성들은 자신이 사는 지방 성소에서 희생제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유다 왕국의 13대왕 히스기야는 솔로몬도 못했던 위대한 종교개혁을 착수하여 이스라엘에 새로운 영성을 불러일으켰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왕하 18:3)

그는 남유다 왕국의 지도자로서 백성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남유다왕국 곳곳의 지방 산당과 주상을 깨부수는 종교개혁에 착수했다. 그런 그가 국가적 위기 앞에서 기도했을 때, 앗수르의 18만 5천명이 죽었고 (왕하 19:35), 남유다 왕국은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글,사진_이호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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