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50년, 100년_전성민 원장(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VIEW)
오늘 같이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의 제목은 “25년, 50년, 그리고 100년”입니다. 여기서 25년, 50년, 100년은 앞이 아니고 뒤로 가 보는 25년, 50년 100년입니다. 2024년에서 25년을 거슬러 가면 1999년 즈음이 됩니다. 이 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998년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이 시작되었습니다. 1997년 11월, 기독교대학설립동역자회를 전신으로 하는 기독학술교육동역회(Disciples with Evangelical Worldview, DEW)에서 양승훈 교수님 가정을 캐나다에 파송했고, 1년 후 양교수님이 ACTS 신학대학원과 협약을 맺으며 VIEW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사진이 1998년 11월 3일 협약을 맺던 장면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개강수련회로 모였습니다만, 초창기 개강수련회의 사진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25년 전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우리 개인들에게 지금 VIEW를 시작하는 이 순간은 처음의 시간이지만 사실 우리는 더 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궤적을 지나왔지만, 오늘 우리 각자의 삶의 궤적이 이 자리에 함께한 다른 분들의 삶의 궤적과 만나고, 무엇보다 우리 삶의 이야기가 VIEW의 이야기와 만나는 접점을 지금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야기들은 더 넓어지고, 더 큰 이야기에 합류하여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 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갑니다.
이제 50년을 거슬러가면 어떻게 될까요? 1974년입니다. 이 즈음인 1973년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의 이사장을 역임하셨던 손봉호 교수님이 「개혁주의」라는 월간지 5월호와 6월호에 각각 “기독교철학은 가능한가?”와 “기독교철학의 전제조건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신 해입니다. “기독교 철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사실상 기독교 세계관을 한국 기독교에 최초로 소개하는 글들이었습니다. 이 글들은 1979년에 출판된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성광출판사)에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생의 일부만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전생활과 전인격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생활의 모든 분야에 신앙적 고찰과 반성은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지성인도 분업이 필요하다. 현대정신이 분업으로 무력해진 것을 거울로 삼아, 전체를 잃어버린 분업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지성은 신학자에게서만 찾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 한다. 철학, 문학, 예술, 과학, 정치, 경제에도 기독교적 반성은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것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불구적인 신앙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15)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뜨끔했던 부분은 “기독교적 지성은 신학자에게서만 찾아야 한다는 사고 방식은 이제 버려야 한다”는 문장에서 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더불어 5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강하게 표현하면,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VIEW에서 함께 고민하며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이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오랜 기간 고민해 온 이야기인지 곱씹어 볼 수 있습니다.
약 50년 전인 1973년에 손봉호 교수님이 위의 두 글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국에 처음으로 알리셨다고 한다면, 이후 기독교 세계관 개념을 가장 대중적으로 알린 책은 송인규 교수님의 『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죄많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독교 신앙과 세상을 잘 이해하는 데 적절한 개념인가, 라는 문제제기를 하는 제목입니다. 이 책의 부제목은 “기독교적 세계관 정립의 시급성”인데요, 송인규 교수님은 이 책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을 설명한 후,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안합니다. 1단계로 ‘분석과 비교’, 2단계로 ‘골격의 형성’을 제안하고, 3단계로 ‘실제적 도움’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실제적 도움’으로 개인적인 말씀과 연구, 기도 및 생활, 그리고 선배 선각자와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하기에 애쓰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며 문제의식을 가진 신앙의 선배를 만나 대화하는 일은 생각 이상의 유익이 있다. 문제는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이든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으며 특히나 한국 기독교의 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겠다. . . . . 중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선배라면 반드시 만날 필요가 있을 것이다”(35)라고 말하며 앞서 제가 인용했던 손봉호 교수님의 글을 인용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신앙의 온전함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대화할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우리들의 바람이 우리를 이 자리까지 이끈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VIEW의 이 자리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작은 대답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참 잘 오셨습니다. 50년 전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 자리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우리의 대답들을 계속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다음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