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박창수 목사의 희년이야기] 서울, 1997년 겨울

서울, 1997년 겨울

내가 철거민을 처음으로 직접 만난 것은 지난 1997년 겨울이었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내가 몸담았던 한 기독청년학생단체에서 기도회가 있었다. “성탄절을 맞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논의하며 기도했다. 한 자매가 TV에서 본 서울 행당동 철거민 마을을 이야기했다. 철거반원들이 굴삭기로 집을 부수고, 저항하는 마을 주민들을 내동댕이치는 등 충격적인 강제철거 과정이 방송된 마을이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기독교인인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 분은 예배를 못 드린 지 오래되었다고 하시며, 정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언제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울타리 밖 교회로 나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때부터 약 6개월간 마을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군용 천막 안에서 일요일마다 저녁 예배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드리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 철거민 마을을 방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시간 전쯤 철거 용역 소장이 왔다. 추기경과 언론사 기자들의 방문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소장을 보자 한 할머니가 거칠게 “가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소장이 천막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밀어내려 하였다. 그 와중에 소장이 발길로 어머니뻘 되는 그 할머니를 옆차기로 걷어찼고 할머니는 나뒹굴었다. 소장이 큰 소리로 주민들을 협박하고 돌아간 다음, 한 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소장이 일전에 와서 철거민들을 협박하면서 사용한 회칼이었다. 

그 철거 용역 회사가 바로 당시에 강제 철거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적준’이었다. 마을 아저씨들은 철거반원들에게 두들겨 맞아, 그 중에는 갈비뼈가 부러진 분들도 계셨고, 아주머니, 할머니들도 임시로 만든 비닐집에서 오래 지내시다가 한기(寒氣) 때문에 몸이 상한 상태였다. 

연세가 80세 정도 되신, 그 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신앙이 깊은 분이셨다. 그 아드님은 철거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이셨고, 연세가 60세 가까이 되셨다. 할머니가 우리를 좋아하셔서 비닐집으로 몇 번 찾아뵈었는데, 아드님이 교회를 안다닌다고 걱정하시곤 하셨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비닐 집안으로 외풍이 너무 심해서 어떻게 할머니가 이런 곳에서 견디실까 걱정스러웠다. 건강을 여쭈어 보았더니, 외풍 때문에 추워서 온 몸이 아프다고 하셨다. 아는 한의사 선배에게 마을 주민들을 위해 한방 진료를 토요일마다 해 줄 수 있는지 부탁드렸다. 그 선배는 기쁨으로 해 주었다. 마을 어르신들과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정말 기뻐하셨다. 그 선배는 침을 놓고 진료를 하며 주민들과 편안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다가 간간이 예수님을 전하였다. 

두 번 정도 서울 동부 지법에 갔다. 법정에서 판사는 검은 법복을 입고 앉아 있었고, 마을의 위원장 아저씨와 부위원장 어르신은 낡은 옷을 입고 서 계신 반면, 재개발조합과 건설회사 측의 변호사는 비싼 양복을 걸치고 앉아 있었는데 무기력해 보였고 단지 돈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었다. 판사는 나이가 지긋하였는데 철거민의 처지를 동정하는 듯하였고, 양측에 원만한 합의를 주문하였다. 그 법정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생각했다. 판사가 앉은 자리에 주님께서 좌정하실 것이요, 탐욕에 눈이 멀어 힘없는 이웃들을 내쫓는 데 가담한 자들은 모두 피고석에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마을에서 예배드리던 군용 천막은 백열전구 하나가 있었고, 나무장작으로 불을 때는 난로가 한 가운데, 그리고 군대 내무반처럼 출입구 좌우로 높은 평상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 분들을 위해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강하고 충만하게 임하셨다. 많은 집회에 참석하였지만 이 천막에서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한량없이 임하신 경험은 드물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는 목적은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희년(禧年)을 선포하기 위함이라는 말씀(누가복음 4:18-19)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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