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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성령 (1), “친밀한 위로자”

성령 (1), “친밀한 위로자”
자신은 세상을 곧 떠날 것이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의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평생토록 그들과 함께 하실 보혜사를 보내 주시는데, 그분은 곧 진리의 영이다고 말씀합니다.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유언을 반복합니다. 내용이 좀더 구체적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보혜사를 보내 주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그분은 곧 성령입니다. 보혜사는 제자들과 영원히 동행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보혜사는 희랍어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 낱말은 “옆” 혹은 “곁에”를 뜻하는 희랍어 “파라”와 “소환되다” 혹은 “부름받다”는 동사 “카레오”의 합성어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의 문자적 의미는 바로 옆으로 부름 받았다입니다. 이 낱말의 형식은 수동적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부름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비록 수동적 형태이지만, 의미에서는 거의 항상 능동적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수동의 형태지만, 그를 부른 주체의 목적과 기능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능동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경우의 부르심은 돕고 지원 하고 봉사하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 파라클레토스는 한 개인이 스스로 대처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소환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도움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해야합니다.  

   우리말 “보혜사”로 번역된 이 낱말을 영어 성경들은 다양하고 여러 의미로 번역합니다. NIV는 “상담자 Counselor,” NKJV은 “돕는자 Helper,” NRSV는 “옹호자 Advocate,” 그리고 KJV와 몇몇 번역들은 이 낱말을 “위로자 Comforter”로 번역합니다. NJB 성경 번역팀은  이 낱말의 의미가 축소되고 제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 단어 선택을 피해 “파라클레테 Paraclete”를 선택 했습니다. “파라클레테”는 희랍어 성령을 뜻하는 “파라클레토스”를 음역한 프랑스어입니다. 이 낱말을  J. B. 필립스는 “당신 옆에 서 있는 어떤 사람,” 그리고 로렌드 낙스는 “너를 친절하게 하는 그분”으로 번역합니다. 이 단어가 적합하게 번역될 수 있는 단일 영어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파라클레토스의 목적과 기능은 현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광대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파라클레토스의 “위로자 Comforter” 역할을 살펴봅니다. 이 낱말이 “위로자”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알려진 존 위클리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위클리프가 사용했던 “위로자”는 현대 영어가 담지 못하는 넓은 의미의 위안자라는 단어였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위클리프가 엡6:10을 “너희는 주 안에서 위로를 받으라”고 번역한 것에서 발견됩니다. 이곳에서 “위로를 받으라”는 단어는 희랍어 “엔두나모오”입니다. 이 단어는 힘과 능력을 의미하는 영어의 다이나마이트가 파생된 희랍어 “두나미스”와 어원이 같습니다. 일반 성경에서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번역되는 “엔두나모오”를 위클리프는 “주 안에서 위로를 받으라”고 번역합니다. 딤전 1:12를 일반 번역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인데, 위클리프는 “나를 위로하신 그리스도”로 번역합니다. 성령은 위로의 역할과 함께 그 결과 암울한 현실을 이기고 새롭게 도약하는 능력을 부어주는 분입니다. 

   “위로자 comforter”는 슬픔과 괴로움에서 위로과 위안, 그리고 동정심과 전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에게  이 낱말은 용감함, 강함, 그리고 용기를 의미하는 라틴어 “포르티스 fortis”와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유일한 그리고 주된 기능은 우리의 말의 의미에서 동정심과 위안를 주는 것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은 우리가 직면한 삶의 위기에서 의기양양하게 대처하여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능력과 용기의 영으로 충만히 채워줍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체험한 이 원리를 시로 표현했습니다. “주께서는 이제는 내 생명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땅의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주께서 나를 더욱 성공하게 하시고 여러 모로 나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옆에 계신 파라클레토스가 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이전의 차원을 넘어 더욱 성공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를 크게 크게 위로했습니다.    이 낱말이 이사야서에서도 동일한 내용으로 사용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마음을 위로하며 말하라.” 그리고 위로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알립니다. “보아라, 주 여호와께서 능력의 하나님으로 오신다. 주께서 그 능력으로 모든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보아라, 주께서 백성에게 주실 상을 가지고 오시며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체험했던 위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성령님은 우리 옆으로 보내졌습니다. 우리를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목적을 갖고 우리와 동행합니다. 성령님의 위로는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밝게 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삶이 무너진 다렌 첵은 절망 의 때에 낡은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 외쳐라 Shout to the LORD”는 마음 속의 음성을 듣고 찬양 가사를 씁니다. “내 구주 예수님 주 같은 분은 없네/ 내 평생에 찬양하리 놀라운 주의 사랑을/ 위로자 되시며 피난처 되신 주님/ 나의 영혼 온 맘 다해 주를 경배 합니다/온 땅이여 주님께 외쳐라/ 능과 위엄의 왕 되신 주.” 이 노래는 지난 20세기에 만들어진 최고의 찬양입니다. 이제 그녀는 위로자 하나님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분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을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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