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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십자가 (1)  “교회가 선택한 심볼 (Symbol)” 

십자가 (1)  “교회가 선택한 심볼 (Symbol)”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자신들이 믿는 중요한 특징을 표현하는 시각적 상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에서 영원성을 의미했고, 도교의 신 중에 나타는 연꽃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에게 연꽃은 신성한 존재입니다. 연꽃의 바퀴모양 때문에 불교에서는사람들의 출생과 죽음의 순환 또는 혼탁한  흙탕물에서 아름다움과 조화의 출현을 상징하는 꽃으로 그것을 중요시합니다. 때때로 부처를 완전히 활짝 핀 연꽃 안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고대 유대교는 형상 만드는 것을 금하는 두 번째 계명에 따라서 시각적 기호와 상징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유대교는 두 개의 정삼각형을 결합하여 만든 육각형인 소위 방패를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채택합니다. 이 육각형은 다윗의 보좌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영원히 견고하게 서고, 메시아가 그의 후손에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중동에서 발생한 이슬람교의 상징은 초승달 모양입니다. 주기적이며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달의 위상은 그들에게 절대 주권을 상징했습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집단도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상징을 소유합니다. 공산주의의 뿌리가 되는 마르크스 주의는 낫과 망치가 상징입니다. 이 상징물은 원래 19세기에 벨기에에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공장과 들판의 결합을 이루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는데, 소련 정부가 1917년에 채택한 마르크스주의 상징이 낫과 망치가 되었습니다. 망치와 낫은 산업과 농업을 나타냅니다. 붉은 바탕에 노란색의 낫과 망치는 공산주의를 나타내는 기호로 노동자의 단결을 뜻합니다. 

   옛 독일 나치당의 상징은 스와스티카 (만자문)입니다. 십자가의 팔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움직임, 사계절의 순환, 또는 창조성과 번영의 과정을 상징하기 위해서 시계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스와스티는 “웰빙”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20세기 초에 일부 독일 그룹에서는 만자문을 아리안 인종의 상징으로 채택했습니다.  그후 히틀러가 그것을 인수했고 이 표시는 나치의 편협한 인종차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도 시각적 상징을 갖는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십자가는 최초의 상징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거친 비난과 극심한 박해 때문에 상징을 갖는 것에 매우 신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을 피해해야 했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유대교가 적대하던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범죄자의 처형과 관련된 수치스런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 표시로 선택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숨었던 지하 동굴인 카타콤의 벽과 천장에 가장 초기의 기독교 상징물로 여겨지는 벽화가 있는데, 불멸을 의미하는 숫공작, 순결함을 의미하는 비둘기, 승리를 의미하는 운동선수의 손바닥,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특히 희랍어 낱말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다섯 글자의 두문자어 (頭文字語)여서 카타콤에 들어 온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2세기 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여러 시각적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숫양을 죽이는 모습,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용광로 속에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 물고기에 의해 토해진 요나, 세례 받는 사람들, 어린양을 품은 목자, 중풍병자의 힐링,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같은 성경적 주제를 화폭에 담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 죄를 범한 인간을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또 성경적 주제의 상징들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외에는 그 상징 속에 담긴 구속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합일 문자인 “키 로 Chi-Rho” (그리스도를 뜻하는 Christos의 처음 두 글자)는 종종 십자가 형태로, 때로는 그 앞에 양이나 비둘기가 서 있는 인기 있는 암호였습니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 있는 기독교적 상징들은 많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뉘여 있던 마굿간의 구유, 젊은이로 일하셨던 목공소의 의자, 갈릴리에서 군중을 가르칠 때 앉아 있던 배, 봉사정신을 보여 주는 사도들의 발을 씻길 때 둘렀던 앞치마, 요셉의 무덤 입구에서 굴려진 돌, 하늘의 환상에서 요한이 본 보좌, 또는 오순절 날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 등이 있습니다. 어떤 상징이든 주님의 사역의 한 측면을 가리키는 표시로 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것 대신에 단순한 십자가를 상징으로 선택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이나 젊음, 그분의 가르침이나 봉사, 부활이나 통치,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십자가 처형을 상징으로 택했습니다. 

   적어도 2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그림적 상징으로 십자가를 그리고 칠하고 새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나 타인에게 십자가 표시를 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이 관행에 대한 최초의 목격자 중 한 사람은 서기 200년경에 활동한 법률가이자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모든 발걸음과 이동, 나오고 들어 올 때마다, 옷과 신발을 신을 때, 목욕할 때, 식탁에 앉을 때, 등불을 켤 때, 소파에 앉을 때, 의자에 앉을 때 등 일상적인 모든 행동에서 날마다의 삶에서 우리는 이마에 표시[십자가]를 그립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선택한 것은 고대 세계에서 십자가형이 공포로 여겨졌던 것을 기억할 때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십자가의 도”가 그의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것”, 심지어 “미친 짓”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정신인 사람이 어떻게 범죄자로 정당하게 정죄를 받고 가장 굴욕적인 형벌을 받아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숭배할 수 있겠습니까?  범죄자, 십자가의 치욕, 그리고 죽음의 결합은 그리스도를 숭배하기는 커녕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렸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 역사에서 실행된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입니다. 그것은 최대한의 고통이 가해질 때까지 고의적으로 죽음을 지연시켰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죽기 전에 며칠 동안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로마인들이 십자가형을 채택했을 때, 그들은 살인이나 반란 또는 무장 강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중대한 범죄자들의 신분이 노예나 외국인 혹은 기타 비인간인 경우에만 그것을 적용했습니다.  로마 시민은 십자가형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공포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들에게 “나무에 달린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끔찍한 진술을 적용했습니다. 그들은 “나무”와 “십자가”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교수형과 십자가 처형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아가 그의 저주 아래서 나무에 달려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앙의 가시적 상징으로 이 십자가를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바울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십자가는 바울 신앙의 모든 것이었고, 흑암의 권세를 이기는 그의 능력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에서 공급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고난의 십자가 외에 우리 죄를 대속할 제도는 없습니다. 인간의 구속은 너무가 치명적이고 값진 것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과 맞 바꾸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기반이며 심장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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